가지치기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 자랐다. 엄동설한 차갑던 바람이 조금씩 기운을 잃어갈 때쯤 꽁꽁 얼었던 대지도 슬슬 녹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땅에서 파란 싹이 돋아나고 겨우내 잠들었던 가지에 움이 트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봄이 오는 걸 시샘이나 하듯 문풍지 사이로 밀려드는 바람은 아직도 코끝을 시리게 했다.
저녁이면 담벼락에 쌓아둔 장작으로 군불을 지폈다. 아랫목이 따끈해지면 이불 밑으로 발을 넣고 나란히 앉아 가정부 누나에게 옛날 이야기 해 달라고 졸라댔다.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뒷간에서 일을 볼 때 엉덩이가 조금은 덜 시릴 즈음이면 아버지는 가지치기를 하신다며 놉을 모았다. 주로 아버지 나이의 분들이셨는데 말 못하는 큰아버님을 제외하고는 다들 아버지를 형님이라 불렀다. 이른 아침 어둠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한 사람 두 사람 모이면 드럼통을 잘라 만든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부터 지폈다. 장작이 훨훨 타오를 때까지 불을 쬐며 한바탕 말씀을 나눈 후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사다리에 올라 가지를 쳐내려 갔다. 잘려진 가지는 다발로 묶어 한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가지치기가 한창일 무렵 어머니와 누나는 부엌을 들락거리며 참을 만들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겨우내 조용히 지내다 일하러 온 분들 대접에 집안이 분주해지니 나도 동생들도 신이 나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설레는 마음에 방과 부엌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했다. 부뚜막에 놓인 찬거리를 표나지 않게 주워 먹을 때도 있었다. 마당에 나가 누렁이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이리저리 함께 뛰어도 다녔다. 가끔 어머니는 "추운데 방에 들어가 있지 왜 밖에 나와 있느냐."며 "얼른 동생들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셨다. 가지치기를 하는 일주일 내내 집안 분위기는 잔칫집이었다.
가지치기가 끝난 후 몇 주가 지나지 않으면 그렇게도 기다리던 봄다운 봄이 찾아 왔다. 겨우내 죽은 듯 움츠려 있던 가지마다 움이 트고 싹이 돋았다. 가정부 누나는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부푼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소쿠리를 옆에 끼고 쑥을 뜯으러 나갔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일 년 전 18층에서 1층으로 이사를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사실 집이라 1층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자그마한 화단이 있는데 정원처럼 가꾸었다. 심은 지 십 년은 더 되어 보이는 등나무가 양쪽에서 보기 좋게 자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은행나무랑 벚나무 모과나무가 어우러져 작은 숲을 이룬다. 어린 시절 자라던 과수원을 추억하게 하는 곳이라 남다른 애착이 간다.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시리라.
올 봄 뜰에 심긴 나무에 가지를 쳐주었다. 가지치기라고는 한 적이 없는 초보자라 일하는 솜씨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안쪽에서 큰아들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버님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가위와 톱을 달라시더니 어설픈 아들에게 시범이라도 보이려는 듯 본인이 직접 가지를 쳐내신다. 너무 짧게 자르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데 이렇게 잘라 내도 금새 새순이 자란다며 가혹하게 잘라 내신다. 그 동안 힘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셨는데 잠시나마 밖에서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가지치기는 봄의 전주곡이기도 하지만 죽여서 살리는 역할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