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노병께 드리는 경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8. 7. 31. 22:57

 노병께 드리는 경례


 열아홉 나이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젊은이는 일주일간의 짧은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받던 중 총기오발 사고로 죽어나가는 동료 학도병을 보면서 전장이 어떤 곳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친 후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총과 배낭 등 장비와 인민군복을 지급받았다. 적의 후방에 침투하므로 인민군으로 위장하려는 의도였다.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포항 위쪽 영덕지역으로 침투하여 적진을 교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전을 수행을 위해 상륙지점으로 항해하던 배는 강구 인근 장사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히며 좌초했다. 특수요원들이 육지와 상륙함 사이에 밧줄을 연결하였다. 미리 포진한 인민군들은 육지로 상륙하는 아군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댔다. 전투기들은 고도를 낮추어 적진을 향하여 폭격을 하고 바다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누그러뜨렸다.

  처음으로 전장을 경험하는 어린 유격대원은 배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곳을 바라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대대장은 권총을 쏘아대며 배에서 내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노라고 소리를 질렀다. 눈을 꾹 감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배와 육지 사이에 연결된 밧줄에 의지해 육지로 향했다.

 적들이 쏘아대는 총알이 '슈웅쑤융' 소리를 내며 물거품을 일으켰다. 총에 맞은 전우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신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사력을 다해 육지에 올라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에 엎드렸다.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전우도 보였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에 따라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냅다 뛰었다.

 대원들은 산속에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많은 수의 전우들이 죽어갔지만 산 사람은 계속 싸워야만 했다. 육지에 상륙한 후 엿새 동안 적군과 대치했다. 비가 끊임없이 내려 군복이 홀딱 젖은 채 긴 시간을 견뎌야 할 때면 바지를 입은채 오줌을 쌌고 잠시나마 따뜻한 체온을 즐길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유격대원들을 태우러 새로운 상륙함이 도착했다. 미군은 들고 있는 총과 배낭 등 장비를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라 했다. 아까운 마음에 버리기를 주저하자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버리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장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귀히 여기는 그들이 우러러 보였다. 사력을 다해 헤엄쳐 배에 올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부지한 전우들은 육군본부가 있는 부산으로 귀환하였다. 부산항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살아 돌아온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신문은 적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적의 전의를 상실케 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며 그들의 전공을 대문짝만 하게 썼고 호외도 뿌려댔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설레는 마음 때문에 잠을 설치는 건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건 내일 있을 가족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길지도 않은 단 하루의 휴가. 어디로 가겠느냐는 물음에 부친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가자고 하셨다. 매년 여름이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잊곤 했는데 지난 두 해 동안은 바다에 다녀오지 못해 아쉬우셨단다.

 어쩌면 6.25동란 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많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소에서 자신이 경험한 전쟁과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 싶으셨으리라.

 출발부터 아이처럼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으신다. 대구 포항 간 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서 내려 칠 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향으로 올라가니 바다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피서철을 맞지 않아서인지 해수욕장은 조용한 편이다. 해송 군락이 지나가는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외로움을 이기려 서로 마주 보며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보다.

 장사해수욕장에 도착하자 무엇인가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바쁘게 걸으신다.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앞에 서셨다. 말없이 주위를 한 바퀴 도신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셨을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켜온 조국의 안녕을 비셨을까.

 사선을 넘나들던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는 듯 눈빛이 흐려있다. 반려자와 함께 기념비에 새겨진 글씨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는 노병의 모습을 보니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울컥 솟아오른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하루가 노병에겐 작은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피와 땀으로 지켜낸 조국이 건재하고 자녀들이 장성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는 지금 더 바랄 게 무엇이랴.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병마와 싸워 이기고 병석에서 일어난 후 유명을 달리한 친구와 전우들의 혼이 깃든 이곳을 다시 와보고 싶으셨으리라. 어느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노병의 등 뒤로 거수경례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