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의미 없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1. 11. 7. 14:22

의미 없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이택희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수술 후 3 주가량 깁스를 하고 있었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음은 물론 샤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옷을 갈아입기도 거북스럽다. 갑자기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하필 왜 내가 사고를 당해 이런 불편을 감내해야 하나.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며 수고해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아내와 나는 시간을 나누어 일했다. 약한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만도 한데 불평 한마디 없었다. 나누어 해도 벅찰 일을 혼자서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 가게 일 외에도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인데.

  깁스를 푸는 날. 무섭게만 느껴지던 수술대에 다시 올랐다. 의사는 전기톱으로 석고를 썰기 시작했다. 톱날이 피부에 닿을 것만 같아 소름이 돋는다. 치과에서 이빨 가는 소리만 무서운 게 아니라 전기톱으로 깁스를 잘라내는 소리도 무섭다.

  깁스만 풀면 자유롭게 다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다리가 구부려지지 않는다. 몇 주 사이에도 다리가 굳어지나 보다. 근육량도 차이도 있다. 한쪽 다리는 튼튼한데 반해 한쪽 다리는 약해 보인다.

  남편의 간호를 위해 매일 병실을 드나드는 할머니가 있다. 자신도 얼마 전 넘어져서 인대를 다쳤다고 했다. 2년이 지났는데도 다리가 굽혀지지 않는단다. 불면 날아갈듯 가는 몸매로 절룩거리며 걷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나 또한 저렇게 되려나.

  부친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삼 개월 동안 병석에 계셨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에는 움직이지 않으셨다. 다리가 자꾸만 가늘어져 갔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하던 근육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샤워기로 물을 끼얹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토록 튼튼하던 다리가 이렇게도 약해졌구나."

순식간에 약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의 육신인가보다.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의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석해균 선장은 몸 여섯 곳에 총상을 입었다. 사경을 헤맸다.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석 선장의 회복을 염원했다. 부응이라도 하듯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수차례의 수술과 재활치료를 거쳐 288일 만에 병원 문을 나섰다.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기쁨 그 자체였다. 의료진의 치료술에 더하여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팔다리가 없는 몸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몸통 하나 만으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그에게 삶의 무게는 벅찼다.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누웠다가 일어나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일어서기조차 힘든 몸으로 윈드서핑을 하고 그린 위에서 퍼팅도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절망은 없다고 몸으로 말한다.

  그는 자신이 쓴 책 닉 부이치치의 허그(원제: Life without Limits)에서 세계적인 파도타기 선수 베다니 해밀턴 양을 소개하고 있다. 13살의 나이에 윈드서핑을 하던 중 타이거 상어에게 공격을 받아 왼쪽 팔을 잃은 소녀. 수술을 한 후 삼 주 만에 다시 서핑을 시작했고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3위에 입상했다. 육신은 약하나 믿음에 바탕을 둔 의지는 강하다.

  병원에 있으려니 석해균 선장의 재활 스토리도, 닉 부이치치의 도전도, 베다니 해밀턴 양의 용기도 절절히 가슴에 와 닫는다. 당신께서는 이런 만남을 허락하시려고 한국의 병원에 눌러 앉게 하셨나 보다. 의미 없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