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 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찹쌀 떡, 찹쌀 떡 사려,”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으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갔다. 정겹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추운 겨울 찹쌀떡을 팔고 다니는 청년이 안쓰러워서 그랬을 것이요 하루가 지나간다는 아쉬움이 있어서였을 터였다.
한 겨울이면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군고구마 장수가 고구마를 굽는 모습이다. 드럼통을 개조하여 만든 틀 아래 부분은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위쪽 작은 미닫이 서랍 속엔 고구마가 익어갔다. 골목길에서 만나게 되는 군고구마 장수에게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퇴근길. 군고구마 몇 개를 사서 봉지에 넣고 집으로 들어갈 때면 은근한 기쁨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봉지에 든 고구마 때문인지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이들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먼저 문을 열었다.
그 옛날 시골에서 방을 데우기 위해서는 군불을 때야 했다. '탁탁'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던 불이 사그라진 후 잔불에 고구마를 던져 넣고 꼬챙이로 뒤집으며 익기를 기다렸다.
얇게 썰어 밀가루와 계란에 묻혀 구워내면 훌륭한 고구마 전이 되었다. 따뜻할 때 한 입 베어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명절이 지난 후 남은 고구마 전은 다른 부침개들과 함께 전 찌개로 끓여져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마를 각광 받는 식물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감자에 비하면 턱없이 인기가 모자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구마가 없다면 영 허전하지 않을까.
고구마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까탈스럽지 않다. 벌레가 달려들어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드물다. 묻어두기만 하면 저절로 자라주는 고마운 식물이다. 둥글둥글 모나지가 않다.
나 역시 까탈스럽지 않고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고 싶다. 곁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사람이고 싶다.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다.
고구마는 최고라고 나서는 일이 없다. 사과나 귤처럼 진열대 가운데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내로라 하지 않는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 또한 내로라 하는 화려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한쪽 구석에 묵묵히 자리하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없으면 은근히 기다려지고 찾게 되는 사람이고 싶다.
한 때는 스스로 최고라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은 최고라 여겼고 남이 하는 일은 하찮게 여겼다. 세월이 지나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고구마는 버릴 것이 없다. 줄기를 삶아 무치면 훌륭한 나물 반찬이 된다. 또한 섬유질이 많아 건강에도 좋다. 변비나 소화장애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나도 고구마처럼 이모저모 쓸모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넉 달 전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신 아버님은 고구마를 즐겨 드셨다. 새벽 운동을 나가시기 전 미리 준비해 둔 고구마 몇 개를 드시고 나가곤 하셨다. 속 쓰림을 해결하는 한 방책이었을 터이다.
고구마 몇 개를 오븐에 넣고 구우니 구수한 냄새가 난다. 오늘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은 따끈한 군고구마에 우유 한 잔이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