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어디로 가시나이까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7. 6. 21. 11:18
      월요일 아침임에도 남들 출근할 시간에 사무실이 아닌 산으로 갔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인적이 뜸한 산길을 혼자 오른다는 게 왠지 어색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랄까. 지금 나이에 이래도 되나 조바심이 난다. 오죽했으면 50대 초반 회사를 그만두고 매일 산에 오른다는 E선배를 생각했을까. 선배는 돈 많은 아버지가 매달 오백 만원씩 본인의 통장에 송금을 해 준다고 했다. 언젠가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며 겸연쩍게 말한 적이 있다. 사업을 하면 있는 재산마저 까먹을 염려가 있으니 일을 벌리지 말라고 극구 말리셨단다. 선배의 아버님처럼 누가 내 통장에 얼마간의 돈을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모아놓은 재산이 많아 평생 돈 걱정 않고 살 정도도 아니다.

     허나 그게 무슨 대수랴. 남에게 꾸지 않고 먹고 살만하면 되었지. 건강한 몸이 있고 오를 산이 있으니 족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다. 가까이 있어도 오르지 못한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하면 산은 산이 아니다. 하지만 내겐 오를 산도 있고, 시간도 있고, 건강도 있다. 
      젊음의 피가 펄펄 끓던 시절 30년 이상 공부하느라, 일 하느라, 돈 버느라 자유롭게 산에 오르지 못했다. 월요일 오전에 마음 편히 산에 간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이제 꿈이 현실이 되었다.

      아침 햇살은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가. 떡갈나무, 소나무, 크고 작은 풀잎이며 막 피어나는 여린 가지를 보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기랴. 유럽대륙도 좋고 북미도 좋고 동남아도 좋지만 가까이 있는 산을 오르는 기쁨 또한 어떤 여행못지 않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홀로 뚜벅뚜벅 걷는 기쁨은 누려본 사람만이 안다. 이제 살만하니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사람, 자식교육에 목을 매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 먹고 살만큼 있으면서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삶의 여유라고는 없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조기은퇴(early retirement)를 즐기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젊은 날에 열심히 돈을 벌어 평생 먹고 살 준비를 끝낸 뒤 미련 없이 은퇴는 즐기는 사람들 말이다. ‘연재민’이란 청년이 있었다. 일찍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여 내노라 하는 컴퓨터 회사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일하다가 한국근무를 자청하였다. 미국인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근무 한 그는 능력 있는 청년이었다. 많은 연봉을 받지만 받는 이상으로 일했다. 일을 손에 잡으면 이삼일쯤 밤을 새는 것은 다반사였다. 이 청년은 젊은 날 돈을 많이 벌어 일찍 은퇴하고 싶다고 했다. 은퇴 후 세계를 여행하며 여유 있게 살고싶다고. 지금은 소식이 끊겨 그가 말한대로 일찍 은퇴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꿈을 꾸었으니 이루었다고 믿고 싶다.    
      산을 오르면서 꿩 울음소리, 딱따구리 나무파는 소리, 다람쥐 내빼는 소리, 크고 작은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다. 밤꽃의 비릿한 향이 진동을 한다. 처음에는 역겨웠으나 갈수록 편해진다. 이른 아침 이슬 내음도 신선하다. 소나무 숲, 떡갈나무 숲을 지나기도 하고 허리 높이의 관목이 도열한 길을 걷는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찔하다. 수줍은 듯 피어있는 들꽃을 보는 잔잔한 기쁨도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은 “행복한 생활은 선한 생활과 닮았다 행복의 비밀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따뜻한 정을 갖는 것이다.”고 했다. 산에 오르며 자연의 세계를 발견하고, 교감하고, 정을 나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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