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감격이 있는 나날 88

삶으로 보여주는 이정표

내가 이상숙 권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로부터였다. 사실은 이상숙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 황요셉 선교사에 대해 들었다. 황 선교사는 야오족 선교를 위해 본 한인교회가 후원하던 파송 선교사였다. 중국의 광둥성에서 소수민족인 야오족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십수 년째 하고 있었다. 황 선교사는 자그마한 키에 얼핏 보기에 약해 보였으나 사실은 매우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대단한 각오와 내려놓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불편함을 감내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고 아내와 자녀를 포함한 가족의 희생까지도 담보해야 가능할 ..

눈 내린 풍경

1974년 2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눈이 많지 않던 대구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계성학교 교정에서 눈 내리는 걸 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급우들은 약속이나 한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우들은 교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교정 곳곳에 흩어져 눈 덮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설국으로 변한 오십 계단 주변은 가히 장관이었다. 탄성을 지르던 것도 잠시, 점심시간이 지나자 눈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따뜻한 기온 탓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당시 오십 계단 주변과 교정 모습은 기억 한편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지금도 눈이 내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내린 눈을 바라보는 건 기쁨을 넘어 경이로움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눈밭..

상처입은 치유자

작가는 동짓달만 되면 우울해진다고 썼다. 위로 딸만 넷인 가정에서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난 작가는 자신의 탄생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았다. 작가의 모친은 오매불망 아들을 바랐는데 딸이 나왔으니 허탈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모양이다. 모친은 당시의 허탈했던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곤 했었나 보다. 기쁨보다는 걱정과 염려,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었던 그날의 이야기가 작가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동짓달의 분노, 동짓달의 쓸쓸함, 동짓달의 푸르스름한 기운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동짓달이 되어야 했다고, 동짓달 추위보다 더 당당해져야 했다고 썼다.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고 고백하는 작가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자신의 아픈 기억을 통해 독자에게 위로를 주고자 하는 마음 씀씀이 존경스럽다. 아픈 기억을..

무엇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가

어릴 적 아랫목에는 콩나물시루가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검은 천을 열고 물을 뿌려주었다. 시루 아래 고여있는 물을 퍼 콩나물에 뿌려주면 어느새 콩나물은 쭉쭉 자라 있었다. 격려와 칭찬은 콩나물시루의 물과 같다. 신달자 시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래도 니는 될 끼다”라고 말해주시며 믿어주셨다. 그 말이 지금의 시인을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역경을 딛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사람이 된 건 '니는 될 끼다'라고 하는 엄마의 기대와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가 딸을 시인으로, 교수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고,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병원 로비에는 이런 글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개에 물려 다친 사람은 반나절 ..

김용진 저 '오선지에 쓰신 삶'을 읽고

캐나다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운전수였다. 아침에 둘째를 학교까지 태워 주고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데려오는 운전수. 물론 수입이 생기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일을 진지하고 진득하게 하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빠가 딸에게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기러기 아빠로 딸과 떨어져 산 십 년, 그 공백을 만회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큰딸은 이미 집을 나가고 없었다. 대학입학 후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아이티로 봉사활동을 떠난다고 하였다. 해밀턴 장로교회에서 파송예배가 있을 예정인데 참석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했다. 시간을 내어 봉사활동을 떠나는 딸이 대견했고 파송예배에 초대해 주는 딸이 고마웠다. 해밀턴 장로교회는 토론토에서 자동차로..

겨울 숲에서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을 불면 바람을 맞는다. 숲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침묵으로 고요한 아침을 맞고 해 질 녘 노을을 끌어안는다. 나는 늘 숲에 끌린다. 얼마동안 만나지 못하면 몸살을 앓곤 한다. 숲이 거기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 나선다.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속 헛..

환경위원회 리더 모임

세밑 식사를 함께 하며 환경과 생태 보전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생태환경 보전 이슈에 젊은이들이 큰 관심을 보였고 참여율이 높았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본한인교회가 토론토 내에서는 처음으로 환경 관련 조직을 만들고 사회정의 실현과 창조세계보존이라는 비전을 수립하고 실천해 나가기 시작한 한 건 괄목할만한 일임을 재 확인하였다. 지난 한 해 세 차례 플로깅과 아나바다 부스 운영, 친환경 비누 만들기 워크숍, 환경 관련 도서 구입 등을 통하여 환경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환경과 생태계 보전에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새해에도 생활 속에서 가능한 일들을 실천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태기로 하였다. 2023년부터..

우주를 울리는 함성

사랑이 생명으로 꽃을 피운다는 건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세 번째 손주의 잉태 소식은 우주를 울리는 함성이요 감격이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했다. 새해 첫날 예배를 드린 후 가족과 식사를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자녀들이 가정을 이루었고 손주까지 생겼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사위와 딸들이 손주와 함께 세배를 하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들의 절을 받으니 감개무량했다. 가정가정 하는 일을 통하여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행복한 나날 보내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큰딸이 카드 하나를 건네준다. 봉투를 열어 카드에 적힌 글을 읽으니 가슴 뭉클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Dear 아빠, 다시 한번 Retirement 축하드려요. 항상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 희생하고 노력하고 캐나다에 와서도 교회에서 ..

더 파벨만스(The Fabelmans)

연말연시가 되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회자되는 영화를 보곤 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내와 함께 시네플렉스 리치먼드 힐(Cineplex Richmond Hill)에서 ‘더 파벨만스(The Fabelmans)’를 보았다. 이 영화는 2023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1순위로 거론되기도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갈등과 혼란(자녀의 입장에서 느끼는), 주인공 샘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 예술적 감성 등을 잘 그려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길을 찾아가는 어린 샘이 자신이라도 되는 양 몰두하며 영화 속에 머물렀다. 유대인 가정의 분위기와 문화를 이해하게 돠는 것은 영화가 주는 덤이라 할 수 있으리라. ‘더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자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영화이기도 하다. 보시길..

관용

오래전 토론토에서 한 가구점을 운영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폴란드 계 직원이 의자를 훔쳐갔다. 주인인 사장이 알게 되었지만 없었던 일로 해주었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으면 그랬을까라며 이해해 주었다. 이후 직원은 더 충성스럽게 일했다. 회사를 그만둔 직원은 어느 날 사장을 찾아왔다. 삼천 불이 필요하니 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이라면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더라고 했다. 수중에 있던 천 불을 내어주며 이천 불은 나중에 주겠노라며 돌려보냈다. 천 불로 때우고 이천 불은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가구점을 운영하던 사장도 당시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을 때였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큰딸이 말했다. "아빠, 돈은 그런 때 쓰라고 버는 것 아닌가요? 없으시면 제가 이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