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감격이 있는 나날

눈 내린 풍경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3. 1. 27. 04:47

1974년 2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눈이 많지 않던 대구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계성학교 교정에서 눈 내리는 걸 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급우들은 약속이나 한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우들은 교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교정 곳곳에 흩어져 눈 덮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설국으로 변한 오십 계단 주변은 가히 장관이었다. 탄성을 지르던 것도 잠시, 점심시간이 지나자 눈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따뜻한 기온 탓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당시 오십 계단 주변과 교정 모습은 기억 한편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지금도 눈이 내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내린 눈을 바라보는 건 기쁨을 넘어 경이로움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눈밭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스노 부츠를 신고 푹푹 빠지는 눈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어제 오후부터 밤까지 많은 눈이 내렸다. 눈 치우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나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눈 내린 정경을 바라보는 기쁨에 푹 빠져버렸다.


<눈 내리는 날/허태기>

따끈한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 창으로 다가서서
꽃비처럼 흘러내리는
눈송이를 무심히 바라보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하얀 백지가 되어

고향을 그리면
고향이 다가오고
어린 시절을 그리면
옛 동무가 찾아준다

커피의 진한 향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떨어지는 눈송이에 넋을 맡기면

흘러내리는 눈송이마다
그리운 사람
사랑하던 사람들이
꽃잎처럼 피어나고
지난 시절의 시린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눈 오는 지도/윤동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하는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우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안에 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를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나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