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138

버킷 리스트

내가 세상에 나와 해보지 못한 일은 스키 타기, 요트 운전하기, 우주선 타기, 바둑 두기, 그리고 자동차 운전하기 (그런 건 별로 해보고 싶지 않고) 내가 세상에 와서 제일 많이 해본 일은 책읽기와 글쓰기,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컴퓨터 자판 두드리기, 자전거 타기, 연필 그림 그리기, 마누라 앞에서 주정하기, 그리고 실연당하기 (이런 일들은 이제 그만해도 좋을 듯하고) 내가 세상에 나와 꼭 해보고 싶은 일은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일주일 정도 지내며 잠을 자기, 전영애 교수 번역본 ‘말테의 수기’ 끝까지 읽기,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그런 일들을 끝까지 나는 이룰 수 있을른지…) 오늘도 안녕! 너의 맑은 영혼의 호수에 내가 구름 그림자 되지 않기를! 꺼졌던 전깃불 다시 살아나듯이. 너에게 사랑 받고..

문학일기 2024.10.01

아침에 시 한 편(보석/박철 외)

싼 것이 편한 인생이 있다 팬티도 양말도 런닝구도 싼 것을 걸쳐야 맘이 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산 운동화를 사골 고듯 신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보석처럼 지키는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싼 것을 걸침으로써 그들에게 밸런스를 맞추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하나씩은 있다 지금 나의 남루 속에 천금같이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청노새 눈망울처럼 절실한 그리움의 보석은 무엔가 무엔가 말이다 어젠는 분명 긴 봄밤이었는데 오늘 잠을 깨니 단풍 이는 가을 새벽이었다 짧은 꿈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묽은 떨림 일장춘몽 속에 나 진정 세상 모두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겐 세상 하나가 반짝이는 옥빛 구슬이었다 한없이 걸어들어가는 구슬문이었다 사랑은 덧없이 싼 가을 낙엽이었으나 나 오늘도 보석 같은 단..

문학일기 2024.09.28

어머니에 대한 후회(정호승) 외

누나 엄마가 오늘 밤을 넘기시긴 어려울 것 같아 그래도 아직 몇 시간은 더 계실 것 같아 봄을 기다리는 초저녁 여섯 시 내가 뭘 안다고 인간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내가 뭘 안다고 여든이 다 된 누나한테 누나 작업실에 좀 다녀올 게 급하게 보내야 할 메일이 있어 금방 올 게 오늘 밤은 엄마 곁에 계속 있어야 하니까 누나는 말없이 나를 보내고 나는 어머니의 집을 나서 학여울역에서 대청역까지 어머니가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 한 정거장 지하철을 타고 작업실로 가 메일을 보내다가 갑자기 노트북 자판기에 커피를 쏟듯 마음이 쏟아져 지금 이 순간 혹시 엄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서둘러 지하철 계단을 뛰어내리는데 호승아 지금 오니 누나의 짧고 차분한 전화 목소리 네 지하철 탔어요 금방 가요 다급히 돌아와 아파트 문을..

문학일기 2024.09.03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신동호)

지쳤거나 심심하거나, 새로운 기분이 필요하거나, 그저 발길 닿는 대로였거나, 강북 어디를 돌고 돌아 집이었는지 길이었는지, 오늘이었는지 먼 훗날이었는지, 공간이었는지 시간이었는지 간에. 창문여고를 지나 장위동 방향으로 오른쪽 길을 올라가는 172번 버스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탄다. 사십 년 전 어디메, 기름 자국이 밴 봉지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는데, 춘천에 생긴 원주통닭집 길모퉁이 어디에서 돈을 세어보고 계실 거 같은 장위동. 하계동 장미 아파트에서 내려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타는 그 자리가 큰딸이 태어나던 시절 살던 하계시영아파트 6동 앞이다. 성북역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 기사께 차비 오십 원이 부족해 절절매던 날들이 마치 지금 같아서 등골에 진땀이 밴다. 거기서 만성 원형탈모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동전..

문학일기 2024.08.22

토요일에도 일해요(유현아) 외

아직도 토요일에 일하는 곳이 있어요?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어요 계절을 앞서가며 미싱을 밟지만 생활은 계절을 앞서 가지 못했지요 어느 계절이나 계절 앞에 선 그 사람이 있었어요 수녀복 만들 때에도, 신사복 만들 때에도, 어린이복 만들 때에도 익숙한 손가락은 미싱 바늘을 타고 부드럽게 움직였어요 단 한 번도 자기 옷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여름엔 에어컨을 틀기 위해, 겨울엔 난방기를 틀기 위해 창문을 닫았어요 떠다니는 실밥과 먼지와 통증들은 온전히 열려 있는 창문 같은 입으로 들어갔어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그의 몸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가끔은 미싱 바늘이 검지를 뚫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일요일이 즐겁기 위해 토요일에 일해요,라고 대답했어요 끝에는 끝이 없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

문학일기 2024.08.21

새와 한그루 탱자나무가 있는집(문태준)외

오래된 탱자나무가 내 앞에 있네 탱자나무에는 수많은 가시가 솟아 있네 오늘은 작은 새가 탱자나무에 앉네 푸른 가시를 피해서 앉네 뾰족하게 돋친 가시 위로 하늘이 내려앉듯이 새는 내게 암송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주네 그 노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듯하네 새는 능인(능할能어질仁)이 아닌가 새와 가시가 솟은 탱자나무는 한덩어리가 아닌가 새는 아직도 노래를 끝내지 않고 옮겨 앉네 나는 새와 한 그루 탱자나무가 있는 집에 사네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

문학일기 2024.08.07

사랑의 전당(김승희) 외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던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천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

문학일기 2024.08.03

무현금(無絃琴)/박승민 외

그러고도 한참을 더 숨을 고른 뒤에야 바람의 환부(患部)를 조심스레 눌러봅니다. 닿는다는 건 자주 바뀌는 당신 마음의 일생을 따라 걷는 일인데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가 마음까지도 모르겠네. 이젠 도통 모르겠네. 투덕거리며 자꾸 당신 쪽으로 귀를 조금 더 기대어놓는 일인데, 이쪽으로 되넘어오는 찌그러진 마음의 대야를 펴서 다시 전해보는 일인데… 이번에는 어떤 화성악도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수백 번을 꼬아서 만든 명주실의 소리들도 끊어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참아 내던 들숨의 현(악기할絃)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허공을 끊고 터져나갈 때, 그 순간의 단심(丹心)만을 생각하며 다시 어두워지는 구름의 공명통 속으로 올려 보냅니다. 한생이란 답장이 오기엔 너무 짧은 거리, 어느 늙수구레한 어둠이 붉은 나뭇잎 ..

문학일기 2024.07.23

아침에 시 한 편(박용재, 나희덕, 김사이)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들어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

문학일기 2024.05.14

어머니와 아들

누운 듯 비스듬히 앉아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드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늙수그레한 아들 아들과 눈 맞추며 몸짓으로 말씀하시는 어머니 두 손 맞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장아장 걸음 옮기신다 뒷걸음치는 아들과 따르시는 어머니 튤립보다 고결하고 라일락 향기 보다 진한 두 사람 눈가에 이슬 고인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2024년, 토론토의 한 이탈리언 식당에서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문학일기 2024.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