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144

글을 말처럼 꺼내라

어깨에 힘을 빼고 글을 말처럼 꺼내라. “먹다 보니 주량이 두배로 늘었어요!” 술 좋아하는 친구가 극찬한 간장약 광고카피다. 뭘 근사하게 보이려고 덧칠하지 말라. 그냥 있는 대로 술술 풀어내라. SNS 문장도 마찬가지다. 폼 잡고 멋 부리며 변죽을 울려보라. 코웃음과 외면, 싸늘한 무플에 시달릴 것이다 여백이 있는 공간이 아름답듯이 문장도 읽는 이의 몫으로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책제목도 그렇게 태어났다. 대교약졸*이라고 했다. 기교보다 관점에 집중하자. 과도한 스토리텔링을 자제하고 내용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군더더기를 들어내면 뼈대가 살아날 것이다. 당신의 주장에 때를 묻히지 마라. 가슴에서 ..

문학일기 2025.03.27

다시, 봄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돌들이늦은 아침잠에 단단하게 들어 있네봄날 하고도 발끝마다 따스한햇볕 묻어나는 아침 다시 봄이다. 겨울 동안 흐리고 어둡던 날씨가 맑고 밝아졌다. 뒤뜰에 내려앉는 햇살이 다사롭다. 창문 앞 멀뚱하게 서있는 키 큰 자작나무 가지에 새가 날아 앉았다. 바람은 아직도 차갑기만 한데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머잖아 담장 옆 수선화도 꽃대를 피워 올릴 것이다.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돌들’, 돌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視線)이 봄볕처럼 따스하다. 뒤뜰에 박혀있는 돌이라고 왜 별이 되고 싶은 마음이 마음이 없겠는가. 우리가 하찮게 바라보는 존재들이 사실은 하찮은 존재가 아닌 것임을. 3월 18일 탄소금식..

문학일기 2025.03.19

깊이 묻다/김사인 외

사람들 가슴에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사람들 가슴에깊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사람들 가슴에겁에 질린 얼굴 있다충혈된 눈들 있다사람들 가슴에막다른 골목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사람들 가슴에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좋은 말, 산 말을 잘하려 애쓰는 것이 시의 본래 자리이지요. 동시에 노래였고요. 말한다는 것의 근본, 울고 노래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시의 근본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종이 위에 쓰인 시’ ‘비유와 이미지 등에 기대서 행과 연을 나눈 서정적인 줄글’이어야 시라고 여기는 우리의 고정관념은 덫일 수 있습니다. 벗어나야 시다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시는 애쓴 말입니다. 고단백의 에너지체여서..

문학일기 2025.02.24

자신의 이야기를 쓰세요

시를 외우고 있다. 첫 단락을 외웠다 싶으면 둘째 단락을 잊어버리고 둘째 단락을 외웠다 싶으면 첫째 단락을 얼버무리기 일쑤다. 부사나 조사를 바꾸어서 외우고 형용사나 접속사를 빼먹곤 한다. 그나마 주어 동사만 잘 기억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시를 외우기 시작한 건 우연한 기회에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소그룹 모임에서의 일이었다. 한 해 동안 하고 싶은 일을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었다. 마침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외우고 있었는데 무심결에 시를 열 편쯤 외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한 달여 지내는 동안 열 편 남짓한 시를 외웠다. 한 달 동안에 외운 걸로 따지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나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외울 수 있는 시가 몇 편이나 될까 생각하면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어느 날 아내가 속삭이듯 조용히 ..

문학일기 2025.01.31

아내가 춤을 추었다

아내가 춤을 추었다. 늦은 밤 본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춤추는 장면에 꽂혔나 보다. 귀에 익은 노래와 리듬이 나왔고 음악에 맞추어 아버지와 딸이 춤을 추기에 따라서 추었다고 했다. 아내는 노래를 찾아달라고 했다.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였다. 아내는 리듬을 타면서 허공에 손을 흔들어댔다. 로봇인양 각을 만들기도 하고 날갯짓을 하며 닭처럼 카펫 위를 뛰었다. 춤에 대한 글을 익었다. “춤추는 몸짓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발등 위에 어린아이를 올리고 왈츠곡에 발을 맞추면 거실은 사랑으로 가득한 무대지요. 강가에서 숨어서 본 큰고니들의 고운 날갯짓에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간절함도 품게 됩니다. 자작나무 잎의 작은 떨림은 달뜨게 살아온 삶을 조용히 뒤돌아..

문학일기 2025.01.31

어느 늦은 저녁 나는/한강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투명한 물결 아래희고 둥근조약돌을 보았지해맑아라,하나, 둘, 셋거기 있었네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그 돌걸음마 시작한 손자 안고 거울을 본다손자도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잠시 얼굴 돌려 골똘히 나를 올려다본다거울과 현실 그 사이에, 내가 있다거울을 넘어온 손자의 눈동자에 내가 가득 찬다거울 속 얼굴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손자를 나도 본다내가 한결 더 맑아졌다그 눈길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아기의 눈빛으로 아기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좀 더 온유해질 것이다. 매섭고 싸늘한 눈초리를 버리고 아기의 ..

문학일기 2025.01.15

버킷 리스트

내가 세상에 나와해보지 못한 일은스키 타기, 요트 운전하기, 우주선 타기,바둑 두기, 그리고 자동차 운전하기(그런 건 별로 해보고 싶지 않고)내가 세상에 와서제일 많이 해본 일은책읽기와 글쓰기,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컴퓨터 자판 두드리기, 자전거 타기,연필 그림 그리기, 마누라 앞에서 주정하기,그리고 실연당하기(이런 일들은 이제 그만해도 좋을 듯하고)내가 세상에 나와꼭 해보고 싶은 일은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일주일 정도 지내며 잠을 자기,전영애 교수 번역본 ‘말테의 수기’ 끝까지 읽기,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그런 일들을 끝까지 나는 이룰 수 있을른지…)오늘도안녕!너의맑은 영혼의 호수에내가구름 그림자 되지 않기를!꺼졌던 전깃불 다시살아나듯이.너에게 사랑 받고 싶다아니다지금이라도 너를사랑하고 싶다.너를 안..

문학일기 2024.10.01

아침에 시 한 편(보석/박철 외)

싼 것이 편한 인생이 있다 팬티도 양말도 런닝구도 싼 것을 걸쳐야 맘이 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산 운동화를 사골 고듯 신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보석처럼 지키는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싼 것을 걸침으로써 그들에게 밸런스를 맞추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하나씩은 있다 지금 나의 남루 속에 천금같이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청노새 눈망울처럼 절실한 그리움의 보석은 무엔가 무엔가 말이다 어젠는 분명 긴 봄밤이었는데 오늘 잠을 깨니 단풍 이는 가을 새벽이었다 짧은 꿈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묽은 떨림 일장춘몽 속에 나 진정 세상 모두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겐 세상 하나가 반짝이는 옥빛 구슬이었다 한없이 걸어들어가는 구슬문이었다 사랑은 덧없이 싼 가을 낙엽이었으나 나 오늘도 보석 같은 단..

문학일기 2024.09.28

어머니에 대한 후회(정호승) 외

누나 엄마가 오늘 밤을 넘기시긴 어려울 것 같아 그래도 아직 몇 시간은 더 계실 것 같아 봄을 기다리는 초저녁 여섯 시 내가 뭘 안다고 인간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내가 뭘 안다고 여든이 다 된 누나한테 누나 작업실에 좀 다녀올 게 급하게 보내야 할 메일이 있어 금방 올 게 오늘 밤은 엄마 곁에 계속 있어야 하니까 누나는 말없이 나를 보내고 나는 어머니의 집을 나서 학여울역에서 대청역까지 어머니가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 한 정거장 지하철을 타고 작업실로 가 메일을 보내다가 갑자기 노트북 자판기에 커피를 쏟듯 마음이 쏟아져 지금 이 순간 혹시 엄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서둘러 지하철 계단을 뛰어내리는데 호승아 지금 오니 누나의 짧고 차분한 전화 목소리 네 지하철 탔어요 금방 가요 다급히 돌아와 아파트 문을..

문학일기 2024.09.03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신동호)

지쳤거나 심심하거나, 새로운 기분이 필요하거나, 그저 발길 닿는 대로였거나, 강북 어디를 돌고 돌아 집이었는지 길이었는지, 오늘이었는지 먼 훗날이었는지, 공간이었는지 시간이었는지 간에. 창문여고를 지나 장위동 방향으로 오른쪽 길을 올라가는 172번 버스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탄다. 사십 년 전 어디메, 기름 자국이 밴 봉지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는데, 춘천에 생긴 원주통닭집 길모퉁이 어디에서 돈을 세어보고 계실 거 같은 장위동. 하계동 장미 아파트에서 내려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타는 그 자리가 큰딸이 태어나던 시절 살던 하계시영아파트 6동 앞이다. 성북역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 기사께 차비 오십 원이 부족해 절절매던 날들이 마치 지금 같아서 등골에 진땀이 밴다. 거기서 만성 원형탈모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동전..

문학일기 202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