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130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작약 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꽃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던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래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작약꽃 구근을 묻어두고 싹이 트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비며 흙이며 공기며 바람이 작약이 피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개화한 꽃의 세계는 바다와 같은 세계고, 정신의 경지로 보자면 전심이 있는 곳이 아닐까)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아침을 생각한다 시집의 첫번째 실린 시가 꽃이다) ..

문학일기 2024.03.22

불고기는 짰다

불고기는 짰다 간장을 너무 많이 부어버린 탓일까 음식을 만들어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마트에서 사 먹거나 식당에서 픽업하여 먹기를 밥 먹듯 했는데 그 정도 맛이라도 냈으면 다행한 일이지 코닐리아 부인은 맛있다는 말만 되뇌이며 짠 불고기를 줄창 입으로 가져갔다 그동안 흘린 눈물에 간이라도 맞추려 했던 걸까 불고기와 나란히 놓인 잡채와 김치 잡채는 투명한 국수인지, 김치는 직접 만든 것인지 물었다 잡채는 투명한 국수 맞고, 김치는 시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 했다 반년 전 남편을 떠나보낸 부인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젊은 부부는 선물 준비하느라, 음식 만들 궁리하느라 분주했을 터였다 코닐리아 부인은 젊은 부부를 꼭 껴안으며 진한 눈물을 흘렸다

문학일기 2024.03.19

국적 상실 신고 한 날

캐나다 국적을 가지게 되었어요 왜 그랬느냐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 캐나다에 살게 되었냐고요? 우주국 지구촌에 살고 싶어서요 여기는 나무 친구들이 많아요 그동안 미련이 남아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했어요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오늘 미루어 왔던 국적 상실 신고를 했어요 이제부터 저는 우주국 지구촌 사람이랍니다 (3/13/2024)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문학일기 2024.03.14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문학일기 2024.03.11

얼마나 억울했을까

텃밭을 일구겠다고 집을 마구 헤집어 놓았을때 너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삽 끝이 밀고 들어와 몸을 댕강 잘라놓아도 하소연 한마디 못한 너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집밖으로 내 던져져 이리저리 몸을 뒤집고 있는 가여운 너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방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래도 방 안은 하나도 좁아지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다시 자리를 고쳐 앉는다 여전히 방 안은 하나도 좁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말이 없다 서로 말 없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누구도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한 사람이 힘이 부치는지 기우뚱 몸을 숙이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없이 기울어지는 몸을 받아 안아주기도 한다 이윽고 날이 저물..

문학일기 2024.03.05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자매는 웃지도 않고 살아요 그 자매가 웃는 모습을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답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날 때면 눈 주변이 파르르 떨리고 안절부절못해요 사람 만나는 걸 맹수 만나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열일곱 사춘기 때 좋아했던 교회 오빠가 ‘너는 웃을 때 입이 많이 커지네’라고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랍니다 무슨 권리로 오빠는 소녀의 웃음을 앗아가 버린 걸까요 평생 제대로 웃지도 못하게 만든 걸까요 교회 오빠는 자신이 한 여인의 삶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웃음을 빼앗아 버렸다는 걸 알지도 못하지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작두 되어 벨 거라고는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

문학일기 2024.02.22

도미니카 자매

내 삶의 마지막 순간도 그랬으면 좋겠네 시를 읇조리며 시와 함께 몇 날을 보내고 싶네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싶네 그럴 수 있다면 가는 길이 덜 외로우리 도미니카 자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씨앗을 흩뿌리며 떠나고 싶네 꽃잎 되어 지고 싶네 아래는 박경희 도미니카님의 부고를 듣고 이해인 시인,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글(시) 2.18 병들어 베어버린 나무 한 그루 다시 보고 싶어 밤새 몸살하며 생각했지 지상의 나무 한 그루와 작별도 이리 서러운데 사랑하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슬픔 감당하기 얼마나 힘든 건지! 너무 쉽게 잊으라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세월이 약이라고 옆에서 자꾸 독촉하면 안 될 것 같아 사랑하는 ..

문학일기 2024.02.20

반성문

나귀를 나비라 하고 딸기를 따기라 하는 너를 보며 잘했다 장하다 우리 아기 어쩌면 이렇게 똑똑하니 똥을 싸도 아이고 우리 아기 똥 쌌구나 예쁘게 말하며 기저귀 갈아주고 똥 닦아 주는데 사 남매 물고 빨며 예쁘다 잘한다 장하다 손뼉 치며 기뻐하셨을 엄마 문고리에 손가락 쩍쩍 달라붙는 동지섣달 찬물에 손 담그고 똥기저귀 빨아 빨랫줄에 너셨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려고 소처럼 일 하셨던 우리 엄마 구십 이제는 엄마가 달라졌다며 이것도 안 드시면 도대체 어떻게 해요 소리를 지르지 엄마가 날 키울 때는 수백 번 잘 못 말해도 수십 번 똥을 싸도 장하다 이쁘다 하셨을 텐데 제 식구들 데리고 잘 살아보겠다며 외국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큰 자식 그것도 자식이라고 밤낮으로 중얼중얼 이름 부르실 우리 엄마 나에게 희망..

문학일기 2024.02.20

아침에 시 한 편(안도현, 최승자)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그슬릴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 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렇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맟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문학일기 2024.02.18

풍경

생긱하고, 차 마시고, 글 쓰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나지막한 언덕과 어린 나무 대여섯 그루, 새와 여우만 다녔을 법한 언덕에 포클레인 한 대가 팔을 굽혔다 폈다 느릿느릿 움직인다. 동녘 하늘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던 해는 구름에 가려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휑한 하늘에 기러기떼 끼욱끼욱 북으로 날아간다. 언덕 쪽으로 사람들이 함께 살 집을 짓겠다한다 집은 언제쯤이나 지어질까? 생애 마지막을 저 언덕에서 지내면 어떨까? 나는 네가 더 예뻐지는 게 좋아 나는 네가 더 행복해지는 게 기뻐 나는 네가 더 예뻐지는 걸 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 나는 네가 더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따라서 기뻐하는 사람 이대로가 좋아 그냥 좋아 이뻐요 이쁘다고 말하는 사람 보면 나도 따라서 이쁘다 아빠가 사 준 트렌치 코트 저녁 찬 바람..

문학일기 202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