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정우영, 장석남, 한재범, 남길순)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4. 14. 00:35

<햇살밥/정우영>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에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 듬뿍 받는 거에요.

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들을요.

봄에는 봄 햇살, 여름에는 여름 햇살, 가을 겨울에는 갈겨울 햇살, 그릇에 넘치겠지요. 구름 그림자 놀다가고 바람은 자고 가고 꽃 냄새, 더엄 냄새는 쉬었다 가겠지요

이보다 영양가 높은 곡식 달리 더 있을까요.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또 고봉으로 쌓아지요. 위봉산 넘어온 저 햇살들,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

함께 사는 소양이하고만 먹기 아까워서 여기저기 기별합니다. 냥이야 제비야 집 나간 모란아, 밥 먹으러 와. 내가 햅살밥 지었단다.


<입동/정우영>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가
나란히 뜀박질 중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소란스럽다
나뭇잎들은 추워 옹송그리지만
아랑곳없이 시끄럽고 화창하다
낡은 가방 멘 큰 그림자가 도망가고
빈손의 작은 그림자 까르르 쫓아간다
유치원 가기 싫은 큰 그림자를
작은 그림자가 밀고 가는 것일까
큰 그림자 따라붙는 작은 그림자가 바쁘다
신이 나 달려가던 작은 그림자,
멈칫 서더니 삐뚤빼뚤 되돌아온다
아이쿠나, 에나멜 분홍신 한짝이 벗겨졌다
신으려던 분홍신을 불빛이 꿰뚫어 오자,
작은 그림자 옆으로 홱 밀어젖히고
큰 그림자는 하얀 스프레이로 남았다
봄부터 입때까지 그림자들 날마다 이러고 있다
반복하고 반복하다보면 철없는 분홍신이
혹 벗겨지지 않을 날 올지도 몰라하고.


<고매(옛古매화나무梅)에 취하다/장석남>
밭뙈기 팔아 들여온 쌀가마에서
고방 항아로리 쌀알들 쏟아지는 소리
햇살이 몽글다
어깨가 좁았던 사람
착해서 가난해진 그 사람의 몸에서 나던 살냄새
바람이 여물 먹는 소처럼 순해진다
몸이 검다는 것은 울음이 많이 쌓였다는 것
청산초 잎이 어린 쥐의 귀처럼
쫑긋하다
탈출구 없는 향기의 감옥
멀리 왔다했으나
여전히 묶였다
온갖 소리 다 스민
저 아래에서
도데체 뿌리는
얼마나 많은 귀일까


<나무의 영혼/장석남>
집을 새로 지으면서
나보다 더 오래 산 장두감 나무를 베어버렸다
너무 큰 나무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 나무의 검은 구멍 속에 귀신이 산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여린 벌레들만 신의 모습으로 기어다녔던 구멍
나무가 사라질 때 대뜸 허공이 들어오려 했지만
나무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삼년이 지나도록
나무가 서 있던 동쪽을 바라보면
허공 대신 어떤 따스한 기운이 옹송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승강기/한재범>
처음 들어가본 건물이다
매일 보던 얼굴인데

승강기 조명 아래서 마주치는 나는 새것 같다 버튼을 누르면 지상과 다른 곳에 도착하도록 설계된 이것

숭강기에 낡은 버튼이 많다 내가 누른 것은 새 곳이 아니고

좋은 곳도 아니다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게 하는 버튼은 승강기에 없다 방금 누른 버튼에 흉터처럼 붉은 빛이 들고

승강기를 타면 괜히 착해지는 기분이 싫어진다

문이 닫히는 동안에도
닫힘 버튼을 누르는 사람처럼

건강을 위해선 승강기 대신 계단을 오르라 들었다 나는 재촉하며 버튼을 누른다 다시 눌러도 꺼지지 않는 빛을
이런다고 내가 빨리 망하는 것도 아니지만

승강기에서는 달리 할 게 없다 안전을 위해 주머니에 손 넣고 서서 지금이 어디쯤인지 확인하는 것 말고는

승강기를 타면 괜히
전생과 화해하고 싶어지고

F층에 도달하지 아까와 같은 문이 열린다 여기가 대체 어디죠 묻는 살마도 내리는 사람도 없은 이것에
“승강기가 이동하는 중에는 움직이지 마세요”
주의 사항만이 남고

잠시만요 좀 잡아주세요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
보이지 않는 몸으로


<유니폼/한재범>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이 자연스럽다 자연을 입은 듯 익숙하다 나는 풍경처럼 흔들린다 짝다리 짚으며 어서 오세요 한다 풍경화처럼 보기 편한 그림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옷이다 이 옷은 겨울옷도 되고 여름옷도 된다 계절은 순환되고 유니폼은 반복된다 매일 입는 이것은 이제 나 같다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이 내게 어울린다 나는 겨울에도 있고 여름에도 있다 유니폼 안에서 자유롭다 울타리 안에서 양을 모는 목양견 같은 그림이다

목양견은 그림을 벗어나지 않고 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끝내 목양견을 벗어난다 나는 벗어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런 데 될 수 없고

내가 아닌 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런 몸을 갖고 싶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 유니폼은 일정하고 내게 자연스럽기에

유니폼을 입고 집까지 간 적도 있다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 저는 이미 충분해요 바깥의 유니폼이 말한다


<낮 동안의 일/남길순>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새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딲고

저만키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한밤의 트램펄린/남길순>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종아리를 걷은 맨발들이 보이고
총총 사라진 뒤

달빛이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트램펄린이 놓여 있고

속이 훤히 비치는 수퍼문이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