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자크 프레베르, 장석남)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4. 4. 22:47

<단어를 찾아서/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여전히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는 것,
지금 내가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기에,
터무니없이 미약하기에,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는 적나라하고 미약할 뿐,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 문학과 지성사 간 중에서-

“우리는 세상을 떠올릴 때마다, 늘 그 거대함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이 겪는 개별적인 고통에는 세상이 너무나도 무관심한 데 대해 쓰라린 분노롤 품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 평범하거니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바위도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그 어떤 구름도, 그 어떤 날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그 어떤 밤도, 무엇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이것이야 말로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는지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노벨상 수상소감 연설문 중에서-

<열쇠/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너를 향한 내 애타는 감정에도
똑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이미 너와 나,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니.
누군가의 낯선 손에 들어 올려져서는
아무런 대문도 열지 못한 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열쇠’의 형태를 지닌 유형물로 존재하게 될
내 잃어버린 열쇠처럼.
고철 덩어리에 덕지덕지 눌러붙은 녹(푸를綠)들은 불같이 화를 내리라.

카드나 별자리, 공작새의 깃털 따위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점괘는 종종 나온다.

-

내일 먼동이 틀 무렵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떠나리라, 나는 떠나리라.
내 증오는 더욱더 깊어만 가리니
이제 나는 인간의 선함도, 그들의 사랑도
믿지 않으리라
나는 11월의 낙엽보다
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
결코 믿음을 주지 말 것,
믿음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
함부로 사랑하지 말 것,
기계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그저 가슴속에 품고 다닐 것.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오래전에 이미 그리되기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니.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나를 뒤흔드는 건 심장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화석에 불과할테니.

견디기 힘든 악몽이 날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견디기 힘든 고독이 날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신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의 확실한 의미’에서
‘애매모호한 비유’를 향해.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치 작았다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평범했다

역사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지 못하고,
더러운 먼지를 내뿜어 우리 눈물을 속였다.
우리 앞에는 칠흑처럼 어둡고 머나먼 길과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

전쟁으로 얻은 우리의 전리품, 그건 세상에 대한 깨달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치 크다는 것,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특별하다는 것.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은 쉽지만 삶에 대해 쓰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삶에는 무수히 많은 세부 항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인 것은 결코 흥미로울 수 없습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유품 노트 중에서-


<아침 식사/자크 프레베르>
그는 잔에 커피를 부었다
그는 커피잔에 우유를 탔다
그는 우유를 탄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
그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다
그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나에겐 아무 말 없이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는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나에겐 아무 말 없이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났다
그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그는 비옷을 입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비속으로 떠나갔다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보지도 않고
그리고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돌멩이들/장석남(1965~>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까만 돌의 표면에는 물결무뉘가 흐르고 파도 소리가 들여왔을 것이다. 몽돌이며 모서리가 덜 깍인 돌, 그리고 조각돌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돌로 책장을 눌러놓거나 집 안 살림에 쓰는 물건의 평형을 맞추려고 아래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다 돌이 최초로 놓여 있던 자리를 문득 헤아린다. 마치 우리에게 생가(날生집家)의 터와도 같은 그곳을 헤아린다.
시인은 묶여 있는 어린 송아지와 송아지의 눈에 서리는 낮달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돌멩이, 송아지, 시인 자신 모두가 같은 처지로서 홀로 따로 사는 형편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와서 사는 목숨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돌멩이는 해변에서 멀리, 송아지는 어미 소에게서 젖을 떼인 채 덩그맣게, 시인은 낯선 타관에서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 시를 읽고 있으니 내 살았던 옛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의 좁은 방, 감꽃과 봉숭아꽃, 나비와 강아지, 양지(볕陽땅地), 수런대던 대숲, 작은 입으로 부르던 유년의 동요가 기억난다.
-조선일보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시>에서 가져옴

<목돈/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원을 받았다
살찐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것인가 이 목돈을 ,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은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스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저녁의 우물/장석남>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천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었다
내가 너덧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 하겠다는 뜻일까
- 장석남 시집 ‘먹이를 하늘에서 구하는 새는 없다, 들꽃세상 간, 1992에서


<배를 매며/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서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넔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런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군불을 지피며2/장석남>
집 부서진 것들을 주워다 지폈는데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내니
한 됫박은 되게 못이 나왔다
어느집 가계(집家이을系)였을까

다시 불을 넣는다
마음에서 두꺼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잉걸로 깊어지는 동안
차갑게 일어서는 속의 못끝들

감히 살아온 생애를 다 넣을 수는 없고 나는
뜨거워진 정강이를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불이 휜다


<水墨(물水먹墨) 정원8/장석남>
-대숲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 저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고름처럼 마음을 흘러 지나간다
-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깨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200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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