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 시인의 시 몇 펀을 읽었다. 맑고 동심(童心)이 살아있는 시가 마음에 와닿는다. 신춘문예 같은 응모 전에 응모하려고 시를 부치러 갔다가 부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시인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긴 시간 고민하며 쓴 시가 심사위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길 것 같은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시인이 쓴 시들은 순수하고 정겹다. 읽으면 마음이 맑아질 것 같아 더 자주 들여다보고 싶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신현정>
시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껍데기를 툭툭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사루비아/신현정>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토란 잎 우산/신현정>
갑작스런 빗발에 근처 밭두렁가에 뛰어들어가
토란 잎 꺾어 우산을 했다
날벌레 몇 마리 들어온다
천장에 달팽이가 붙어 있다
그랬었구나 어딜 가는 중인지는 몰라도 내가 대신 걸어주마
토란 잎 우산을 빙그르 돌리며 간다.
<담에 빗자루를 기대며/신현정>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
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
얼마만이냐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
마당에 물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
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
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
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
마당 쓸고 나서 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
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바람난 모자/신현정>
모자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휘파람새 같은 것으로
너구리 같은 것으로
물고기 같은 것으로
아니 샤르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푹 눌러쓰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쓰고 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악어 같은 것으로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해바라기/신현정>
해바라기, 길 가다가 서 있는 것 보면 나도 우뚝 서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고 벗고 하는 건방진 모자일망정
머리 위로 정중히 들어 올려서는
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단한 목례를 해 보이고는
내 딴에는 우아하기 그지없는
원반 던지는 포즈를 취해보는 것이다
그럴까
해를 먹어버릴까
해를 먹고 불새를 활활 토해낼까
그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겠지
오늘도 해 돌아서 왔다
-문태준 시인은 “나는 언젠가 신현정 시인의 시에 대해 ‘명랑하고 천진하고 또 부럽기까지 한 장난기도 썩이어 있다. 순응과 긍정과 운치와 웃음과 신명과 상승은 그의 시 특유의 소유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토란 잎 우산'도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라고 쓰고 있다. 불교신문 8/28/23자 신현정 시 ‘토란 잎 우산’ 해설 중에서
-이시백 소설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신현종 시인에 대해 이렇게 썼다고 한다.(뉴스핌3/28/24 오광수 기자 기사 참조) “병고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시에 대한 사랑은 삶에 대한 조용한 웃음이며, 그가 꿈꿔온 세상의 화창함이었다. 시인은 세계와 자아 사이에서 연결된 아주 섬세한 더듬이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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