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신현정)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3. 27. 22:19

<극명(이길克밝을明)/신현정 1948~2009>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날아들 갔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가지 저 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은 무엇인가. 매우 분명함이요, 깊은 속까지 샅샅이 똑똑하게 밝힘이다. 아주 뚜렷함을 본다는 것이니 시인은 이른 아침에 반짝임의, 광채의 현현(나타날顯나타날現)을 보았다는 것이겠다.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 가지를, 마당을 옮겨 난다. 그가 옮겨 나는 것에는 반짝임이 있다. ‘종종걸음’이나 ‘재잘재잘’이라는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겉의 생김새나 모습 미미한 움직임, 소리에도 빛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게다가 참새가 바로 눈앞에 있을 때에만 빛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그 자라이도 빛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새가 날아가고 남은 빈 가지, 울타리, 쥐똥나무, 마당, 그리고 시인의 내면에서도 반짝임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보면 개개의 존재가 각각 광원(빛光근원原)이다.

시인은 시 ‘나비 날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비야 나비야
오늘 입고 나온 그 눈부신 옷,
그동안 어디다
꼭꼭 쟁여두었다가 입고 나왔니

이 나비도 마찬가지로 봄빛 같은 반짝임을 입고 있다.
(문태준 시인의 시 해설/조선일보에서 가져옴)


<오리 한 줄/신현정>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가면 된다
뒤뚱뒤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꽥꽥


<화창한 날/신현정>
집을 돌았다
분꽃을 따 입술에 물고 분꽃을 불면서 돌았다
분꽃 꽁무니가 달짝지근했다
장닭을 불면서 돌았다
나도 목을 길게 빼올리고는 꼬끼오도 해보면서 돌았다
개를 불면서 돌았다
담장을 훌쩍 넘어가라고 애드벌룬만 하게 개를 불면서 돌았다
고무호스를 불면서 돌았다
고무호스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부웅부웅 불며 돌았다
벌 떼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맨발로 돌았다
집아 사방을 뺑돌아 열려져라
집을 불면서 돌았다


<염소와 풀밭/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눈사람은 눈을 먹고 산다/신현정>
눈사람이 섰다
눈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아마 눈을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내리는 눈을 먹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눈이 그만 내리고 눈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눈사람은 제 몸뚱이를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럴지 모른다
긴긴 겨울은 그렇게 오고 갔으며 그리고 봄이 왔다


<도깨비바늘/신현정>
한낮, 외진 길가 풀섶에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며
그림자도 없이 서 있는 도깨비바늘에는
도깨비가 살면서
이제나 저제나 언제나 세상에 나가볼까 하고는
거길 지나치는 하 세월의 것들에게
무심한 옷이나 한 벌 지어 입으라고
바늘을 꽃고 있으렷다


<빙점(얼음氷점찍을 점點)/신현정>
첫, 겨울
냇강을 오르내리며 살던 붕어가 세상이 어디인가 하고
아주 쬐끔 입질해 물을 열어보았던 것인데
그만 닫는 걸 잊고 가버린 거기에서부터
온 천지가 물 얼다


<하산下山/신현정>
산을 오를 때 지나친 벼랑을
내려오면서 보게 된다
까마득히 내려다뵈는 벼랑 어디쯤
파란 솔 한그루 몸을 틀었다
알겠다
그 아래부터는 죄다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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