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3. 22. 01:42

<작약 꽃 피면/문태준>
작약 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꽃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던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래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작약꽃 구근을 묻어두고 싹이 트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비며 흙이며 공기며 바람이 작약이 피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개화한 꽃의 세계는 바다와 같은 세계고, 정신의 경지로 보자면 전심이 있는 곳이 아닐까)


<꽃/문태준>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아침을 생각한다 시집의 첫번째 실린 시가 꽃이다)


<잘한 일/문태준>
일어나 밥 먹기 전에
토마토 순에 지지대를 대주었다
부추밭에 물조리개로 물을 뿌려주었다
가지에 북을 도토록하게 돋우었다
우리집 자연에게
싫어할 소리를 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다른 생명에게 해로운 일들을 하지 않았다)


<동근(同根)/문태준>
대지가 가물어 사람도 가물어요
나는 대지의 작은 풀꽃
흥얼거리는 실개천
대지에게 먹을 물이 모자라니
나는 암석 같아요
대지가 가물어 사람도 가물어요
나는 대지의 작은 풀꽃
흥얼거리는 실개천
대지에게 먹을 물이 모자리니
나는 암석 같아요

(바질 머위 당근을 심었다. 폐가 상태로 집이 있었는데 집을 다시 지었더니 땅심이 좋다. 지렁이 굼벵이가 많다. 지렁이 지자를 써서 국우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명세계의 유기적 관계를 보게 된다. 연결되어 있고 뿌리로 다 영켜있다고 느낀다. 제주도는 바람을 견디기가 쉽지 않다. 제주살이 한달 석달 반년하러 오는 사람들도 더러있다.)


<모자/문태준>
그이가 모자를 내 집에 놓고 갔네
나는 아침저녁으로 모자를 보네
모자를 쓰고 집안을 돌아다니기도 하네
날이 갈수록 그이 생각이 간절하네
모자챙에 가려져 있던 서글서글한 눈에
파초 잎 같은 귀
모았다 찬찬하게 움직이던 손
연한 빛깔의 미소
말없이 앉아 있던 뒷모습
나는 오늘도 모자를 보네
가는 선을 잇고 이어 그이의 얼굴을 그리네


<하귤나무에 앉은 새/문태준>
새야, 새야
너의 노래는 신곡이야
어제와는 다른 노래
멈추지 말아줘
너의 목소리로 번역된
이 새 아침
우리 모두의 노래를

(정호승 선생님이 꿈에 나타나셨다-주저 앉을 셈이냐라고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문정희 김용택 선생님도 잘해주신다.)


<큰 눈 오시는 날에/문태준>
오늘은 눈이 하도 많이 내리시네
나는 종일 대 빗자루로 눈을 쓰네
눈을 쓸다 잠시 눈 그치면
모자와 웃옷에 쌓인 눈을 털고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네
그러다 눈발이 굴어지면
다시 대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쓰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눈을 쓰네
밥 먹는 것 뺴곤 눈만 쓰네
찾아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눈을 쓸어 길을 내네
길 한편엔 눈 사람도 앉혀 놓네
낸 길은 금방 눈에 덮여 사라지네
대 빗자루는 곧 닳아 없어지겠네

(평상이라고 하는 들마루가 좋았다. 국수 삶아 먹고 모깃불 놓고 밤에 하늘도 바라보고. 무작을 하게 되면 생각이 비교적 단출해지는 것 같다. 하루 종일 풀 뽑으면서 지내는데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귤밭집/문태준>
밭에 집을 짓고 사는 그이는 한 가지 옷을 입고 살아 천의 색이 다 바랬네
오래 입고 입어 이제 옷은 색깔이 없네

(사과 궤짝 짜던 일, 판자를 잇고, 못을 박아, 뒤란 집그늘이 생기면 퍼질러 앉아 못질을 하면서 궤짝을 짠다. 두 달 내내 오후에는 궤짝을 짯어야 했다. 시집 70권을 사서 김천으로 내려가서 두 달 정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때가 시인이 되는 큰 계기가 된 것 같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문태준>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꿈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 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 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 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속에 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원래있던 곳 본처가 생각났다. 원래 있던 곳 시골이 생각이났다. 지렁이에게 땅이 있다면 내게는 시골의 고향이 있었다)


<첫기억/문태준>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 살이나 되었을까

볕마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작은 노래

아마 서너 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9남매였던 아버지는 천수답 두 마지기로 시작하셨다. 채마밭에 상추며 부추며 해드실려고 있었는데 밭을 매러 가면 깨끗하게 매져있었다. 외할어버지와 외할머니가 채마밭에 오셔서 밭을 매고 가셨다. 대구에서 장사를 하신 적도 있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대구에 와서 작은 가게를 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그게 잘 안되었던 모양이다. 콩나물도 팔고 계란도 팔고 그러셨던 모양이다. 결혼 후 6~7년째 되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콩나물 사러왔을 때 좀 더 달라고 그러면 더 주고 계란 깨고 오면 계란도 바꾸어주고 사탕을 빨다고 가지고 오면 그걸 바꾸어 주었다고 하시더라. 70년 봄에 문시인을 뱃속에 배고 3월에 대구에서 김천으로 다시 돌아가서 10월에 자신을 낳았다)
(대문도 없는 집들어오는 초입에서 누나에게 업혀있는 걸 보는 듯한 느낌, 어렷을 때의 기억과 느낌들이 큰 시적 상상과 혹은 시적인 것의 큰 뿌리같은 것이 된 느낌이다. 큰 샘같은 느낌이다.)
(집에 우물을 파시겠다고 집터에 딸려있는 땅을 파서 들어가신 것 같다.)


<아버지의 잠/문태준>
아버지는 잠이 많아지네
시든 풀 같은 잠을 덮네
아버지는 일만 가지의 일을 했지
그래서 많고 많아라, 아버지를 잠들게 하는 것은
누운 아버지는 늙은 오이 같네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또 잠이 들었네
늙은 아버지는 목침 하나 덩그러니 놓아두고
잠 속으로 아주 갈지도 몰라
아버지는 세상을 위해 일만 가지의 일을 했지
그럼, 그렇고 말고!
아버지는 느티나무 그늘이 늙을 때까지 잠잘 만하지

(아버지의 심사를 농사해보니 알게 되더라, 풀짐 지고 돌아오시던 아버지 모습, 소를 끌고 어둑해질 때 돌아오시면 멀리서 들러던 워낭소리, 농로를 따라 돌아오시던 아버지 소 받아라-소 몰고 들어가자 두 번째 자연을 만난 것 같다 김천 봉산면에서 만났던 자연에 이어 제주에 살면서 만나는 자연 생명세계와 한 인간으로서의 시인을 생각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문학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에 시 한 편(신현정)  (1) 2024.03.27
리스본에서 보내온 사진  (0) 2024.03.22
불고기는 짰다  (0) 2024.03.19
국적 상실 신고 한 날  (1) 2024.03.14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0) 2024.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