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리스본에서 보내온 사진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3. 22. 04:33

<리스본에서 보내온 사진/한소>
후배가 리스본에 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니 내가 리스본에 있는 듯 환했다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을 겪었지만 회복하여 잘 사는 것이 좋았고
새로운 곳에서 행복해할 후배의 마음을 생각하며 좋았다
만약 그가 이십몇 년 전 이곳 노스 아메리카로 거처를 옮겨 오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잘 살고 있을까
캐러비언에서 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아내가 살았을 때 무거운 짐만 이리저리 나르지 말고 둘이서 오붓이 여행을 떠났어도 좋았으리라
누구든 한 생애가 끝나기 전 행복한 시간을 함께 갖는 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아픈 마음 부둥켜안고 슬픔에 젖어 살거나
후회만 남을 삶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리스본에서 보내온 사진을 보니 내가 그곳에 있기라도 하듯 흡족했다



<풍경의 깊이/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고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는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노숙/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코스모스/김사인>
누구도 핍박해 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감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 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이성선 시인(1941~2001.5)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봄밤/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도 ㅑ 형, 요새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도 ㅑ 알었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 들어와 비닐봉다리 쥐여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 혀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 장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으보기는 츰이네요 해쌓며 푼수 주모(50세)가 빈 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들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헤숴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넘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 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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