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3. 11. 21:09

<맨발/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맺었으리라
(2004년에 발표)


<가재미/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가만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이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2005년에 발표)


<이 시간에 이 햇살은/문태준>
마른 산수국과 축축한 돌이끼에 햇살이 쏟아지네
묏등과 무덤을 두른 산담에 햇살이 쏟아지네
끔적끔적 슬쩍 감았다 뜨는 눈 위에 햇살이 쏟아지네
나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걸음소리에 햇살은 쏟아지네
서럽고 섭섭하고 기다리는 홀쭉한 햇살은 쏟아지네
외할머니의 흰 머리칼에 꽂은 은비녀 같은 햇살은 쏟아지네
이 시간에 이 햇살은 쏟아지네
찬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으니 따라와 바깥에 서 있네

(제주도 사려니숲길, 산책 삼아 걸을 수 있는 숲길 –오후의 햇살 어떤 존재들에게 쏟아지는가? 지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차별없이 내려비친다.  햇살이 화단에 비칠때 모든 꽃들에게 골고루 비친다. 소낙비가 쏟아질 때 키카 큰 나무건 키가 작은 나무건 잎이 큰 나무건 잎이 작은 나무든 모든 생명들에게 골고루 쏟아진다)


<두터운 스웨터/문태준>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 날에 걸쳐 짜네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스한 가슴을 짜네


<우리는 서로에게/문태준>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는 갈 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노래한 시)


<저녁이 올 때/문태준>
내가 들어서는 여기는
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

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
나는 모래알, 잎새
나는 이제 구름, 애가(슬플哀노래歌), 빗방울

산 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나무의 한 가지 한 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어요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가며 날아 앉아요

새들이 날아가도록 허공은 왼쪽을 크게 비워 놓았어요

모두가
흐르는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쪽 하늘로 가는 돛배처럼

(시골집 해가 어둑해질 때 산책을 갔다. 길에 혼자 서있다가 어둠 속에 묻히고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이 풀벌레의 몸으로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내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전변) 내가 다른 존재와 유사해지는 것, 내가 다른 존재되어보는 경험, 나라는 존재는 생명들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생명 세계는 삶과 죽음 사라짐 계속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데 나는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사나? 나는 생명 세계의 일부이다. 생명 공동체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다른 쪽으로 이동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심중에 원래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감정을 일깨워 주는 것도 시의 역할일 수 있겠다)

*시인의 이야기를 괄호 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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