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한소>
자매는
웃지도 않고 살아요
그 자매가
웃는 모습을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답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날 때면
눈 주변이 파르르 떨리고
안절부절못해요
사람 만나는 걸
맹수 만나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열일곱 사춘기 때
좋아했던 교회 오빠가
‘너는 웃을 때 입이 많이 커지네’라고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랍니다
무슨 권리로 오빠는
소녀의 웃음을 앗아가 버린 걸까요
평생 제대로 웃지도 못하게 만든 걸까요
교회 오빠는 자신이
한 여인의 삶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웃음을
빼앗아 버렸다는 걸
알지도 못하지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작두 되어 벨 거라고는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나머지 날/도종환>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
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
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
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 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 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어느 저녁/도종환>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 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 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 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는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 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나기 전에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끝내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카시아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게레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들국화/도종환>
들국화 꽃잎에 가을 햇볕이 앉아 있다 얇고 여린 피부에서 윤이 난다 내게 들국화는 들국화 이상이다 이 세상 모든 꽃이 저마다 빛나는 얼굴을 지녔고 하나의 성기와 몇 개의 꽃술을 갖고 있지만 나는 들국화만 그걸 갖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꽃이 아니에요라고 들국화는 말하지만 나는 들국화에 마음이 빼앗긴 지 오래다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꽃잎의 표정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걸 보면서 느티나무는 내가 들국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망을 들국화라 부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들국화를 보면 마음이 끌리고 연한 빛깔 위에 내린 햇살 곁에 나란히 있고 싶고 작고 투명한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내 팔에 기댄 채 들국화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 번져오는 맑은 기운이 내 몸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구석구석 따스하게 번져나가고 내 영혼의 물줄기가 그에게 흘러가 그의 뿌리를 적실 때도 있다 오늘도 들국화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 들국화 곁에서도 문득 들국화가 궁금해진다 특별할 것 없는 들국화의 소박한 나날과 꽃잎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짙는 녹색의 이파리와 이파리 밑에 감춰진 그늘과 가을까지 오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짐승들과 상처와 빗줄기까지 사랑한다는 걸 들국화가 믿어주길 바란다 사랑이 왜 편애일 수밖에 없는지 알기에 가을 햇볕도 들국화 꽃잎 위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리라
*선망: 자신에게는 없는 뛰어난 특질이나 업적, 재산 등을 다른 사람이 가질 때 일어나는, 그들에게의 갈망, 혹은 대상이 그것들을 잃게 되기를 바라는 감정.
질투와 선망의 비교: 질투는 주로 현실, 상상에 지나지 않고, 자신 이외의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보인다. 선망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이며, 부러운 대상을 파괴해 버리지만, 질투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은 존재하고, 선망처럼 부러운 대상이 파괴되어버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질투 속에 선망이 포함되는 경우는 있다. 선망을 넘어서 발달하는, 동시에 대립되는 정서로는 감사를 들 수 있다.
<들국화2/도종환>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내소사/도종환>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상처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이 곁에 사월꽃등 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쌀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는 그의 법당이 몇백 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공포(이바지할供쌀包):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 쪽.
-창비시선 403 <사월바다> 도종환 시집, 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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