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안도현>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그슬릴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 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렇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맟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 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일기/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북항/안도현>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
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 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나비의 관정(대롱管우물井)공사기술에 대한 보고서/안도현>
나비의 몸속에는 보이지 않는 배관이 있다 그 배관의 길이와 펌프의 용량은 꽃대의 길이와 비례한다 꽃잎 속의 지하수량과 꽃대의 길이가 나비의 능력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이 불가능하다 꽃잎 속에 만만찮은 암반이 도사리고 있을 때 나비는 오래 꽃을 떠나지 않는 습성이 있다 암반 속에서도 연못이 찰랑거릴 수 있다는 것을 나비는 알기 때문이다 다만 유채꽃이 수십만 평 흐드러져도 정착하지 못하고 국외 망명자처럼 떠도는 나비들이 많다는 건 큰 문제다 저 소음도 흙탕물도 없는 관정 공사 기술이란 지구상에 거의 유일무이한 탓이다
<말뚝/안도현>
말뚝은 땅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인가 땅속에서 지상으로 한 자 남짓 손목을 불쑥 뻗어 흔들고 있는 것인가 과연 말뚝에도 꽃이 필 수 있을 것인가
말뚝을 볼 때마다 그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다이빙을 하면서 물속으로 온몸을 꽃아 넣어 본 적도 있고 물속에서는 그녀를 향해 여기, 여기, 하며 잘 난체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였다 땅속에 나를 심는 일은 두려웠으므로
괜히, 말뚝에다 깃발을 내다 걸 수 있어야지 원, 말뚝을 뽑아 오케스타라의 지휘봉으로 쓸 수도 없는 걸 하고 투덜거렸다 말뚝은 고요하고 엄정했다 지구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기 위해 누군가 청진기를 갖다 대고 있는 것 같았고 별의 운행을 기록하기 위해 망원경을 고정시켜놓은 것 같았다
옛날에는 말뚝이 봉놋방 주모의 기둥서방이었으나 비유의 시절이 다하자 내 친구 말뚝하사 張하사한테 말뚝은 최저생계비였다 그러다가 말뚝은 한때 투기꾼의 하수인이었다 말하자자면 제 영역을 표시하는 고양이의 오줌 같은 것이었다
지금 말뚝은 똥구멍이 예쁜 흑염소들의 탁아소 보모다 매일 아침 아장아장 걸으면서도 애햄, 헛기침하며 출근하는 염소들을 묶어 빙빙 돌리며 놀아주다 보면 해가 이마에 손을 얹고 노곤해진다 말뚝과 염소의 거리며 해와 나와의 거리를 셈해보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하여, 나도 이제 나뭇잎을 몸에서 다 떼어내고 말뚝이 되고 싶은 거다 눈송이의 의자가 되고 싶은 거다 흰 눈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변두리 흑염소네 집도 쫄랑쫄랑 따라가보고 싶은 거다 그때 너도 함께 가겠니?
<파종의 힘/안도현>
옥수수 서나 알을 땅에 묻었다
이놈들이 땅거죽을 뚫고 올라오나 안 올라오나 궁금해하는 동안 자꾸 겨드랑이가 가려웠다
내 겨드랑이에 병이 든 게 틀림없다고 생각헀다
나 혼자 않는 병은 밤하늘에 뿌려 놓은 의심처럼 많은 것이어서
나 혼자 앓는 병은 빗방울이 땅을 갉아먹을 때처럼 아까운 것이어서
나 혼자 않는 병은 귓가에 여치소리를 달고 있는 옥수수염을 미리 상상하는 것처럼 성급한 것이어서
여러 날이 지난 뒤 땅속에 숨어 있던 새가 연둣빛 부리를 내밀었다
이 뽀족한 부리들이
내 무릎을 쪼아 먹고 내 허리를 쪼아 먹고 내 눈썹을 쪼아 먹는 날이 언제일까 궁금해 하는 동안 내 머리카락은 수시로 서걱거렸다
밤기차가 옥수수 줄기 끝 수꽃을 타고 오르는 꿈을 꾸었다
내 상상은 피의 두더지들이 지나간 손등의 핏줄같이 푸르스름하여서
내 상상은 거처가 없고 처자식도 봉양할 부모도 없고 오로지 흔들리는 그림자만 있어서
내 상상은 죽도록 사랑할 애인도 없고 이별 따윈 더더욱 없고 옥수숫대의 종아리만 있어서
나는 누군가 나에게 흔들리는 옥수수 그림자를 경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간신히 이를 가지런히 내보이며 파종의 힘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안도현>
부엌, 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곧잘 슬퍼져요 부엌은 늙거나 사라져버렸으니까요 덩달아 부엌, 이라는 말도 떠나가겠죠? 안그래도 외할머니는 벌써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더는 고등어를 굽지 않아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아궁이 생각나요? 아아, 나는 어릴 때 아궁이 앞에서 불꽃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말도 안 돼, 하면서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우는 소리로 밥이 익는다고 생각했어요 알아요? 아궁이는 어두워지면 부엌의 이글거리는 눈이 되어주었지요 참 크고 붉은 눈이었어요 이제 아무도 자신의 묽은 눈을 태우지 않아요 숯불 위에 말이 쓰러져요 나는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아요
<아득하기만 한 당신/안도현>
눈발 성긋성긋 날리는데 우편배달부 오토바이 소리 들리나, 안 들리나 감나무 가지 끝에 귀를 매달아두고 있었지
석유난로 계량기 눈금이 수평이 되도록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으나 겨우내 나는 토끼의 뿔과 노루의 좆이 궁금했지
헬리콥터가 숲 위로 날아갈 때
헬리콥터 그림자가 푸드덕거리며 떨여져 내려
오리나무는 옹송그려 쥐고 있던 새순을 그만 칵, 펼쳐 놓았고
마치 쳐녀의 치마 속에 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것은 처녀치마라는 꽃을 처음 만난 날
외상 한 푼 달아놓지 않은 이슬의 가게,
새벽에 지나갈 때마다 미안해서 주인하고 눈을 맞출 수 없었지
보이는 화병에 꽃아둔 백합이 말라가면
보이지 않는 화병 속 줄기는 썩고 있다는 뜻이었지
여름 저녁 만경들 보릿짚 타는 냄새는
무려 구십만 평이었고, 이슥해지면
툇마루 끝에서 아랫도리로 달을 얻어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가슴이라는 말과 심장이라는 말을 구별해서 쓰는 북조선.
사리원 지나가면서 미 1기병사단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는 말
듣고 나서 나는 거기 늘 늦게 도착한다는 걸 알았지
아득하기만 한 당신아, 서정아, 이 몹쓸 년아,
너는 어느 유곽에서 또 몸을 팔고 있느뇨?
-시집 <북항, 문학동네시인선 020 안도현, 2012>
<세월의 학교에서/최승자>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최승자>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아침 식탁, 커피 한 스푼의 無
커피 물 한 잔의 무한(無한정할限)
(창밖에서 한 아이가
사과를 먹고 있습니다
한 세계를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달이 지고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하늘 虛(빌虛) 한 잔>
아침마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운다
눈앞에는 거대한 아파트 군단
그 위로 펼쳐져 있는 회색 하늘
아침마다 그 하늘 虛 한 잔을 마신다
담담하게, 밍밍하게
(어쩌면 이 시시한
밀레니엄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새 한 마리조차 없을까)
<한 아이가/최승자>
한 아이가 뛰어간다
하늘은 늘 회색이었다
건성건성 누군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한 세기가 무심코 웃고 있었다
<참 우습다/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7세인걸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보다
그동안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최승자>
시간은 국가들이었고
제도들이었고 도덕들이었고
한마디로 가치관들이었는데,
가치관들이 세계라는 이 세상에 범람했었는데
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
(시간 속에서
비가 내리고 있는 이 세상
많은 꿈들이, 젖어 흘러가는 이 세상)
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
(혹은 초시간적 의미에서
또는 우주적 총합의
축소로서의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
<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최승자>
도데체 통합이 되지 않고
시작이 되지 않는
이 어지러운 文明의 잠자리
일어나지도 못한 채
꿈자리만 깊어진다
그 와중에서도 어디선가
문든 문득 툭 툭
전쟁이 터진다는 소식
참 유구한 역사
참 유구한 문명
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
참 유구한
-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