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풍경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2. 16. 01:06

<풍경/한소>
생긱하고, 차 마시고, 글 쓰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나지막한 언덕과 어린 나무 대여섯 그루,
새와 여우만 다녔을 법한 언덕에 포클레인 한 대가 팔을 굽혔다 폈다 느릿느릿 움직인다.
동녘 하늘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던 해는 구름에 가려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휑한 하늘에 기러기떼 끼욱끼욱 북으로 날아간다.
언덕 쪽으로 사람들이 함께 살 집을  짓겠다한다 집은 언제쯤이나 지어질까? 생애 마지막을 저 언덕에서 지내면 어떨까?

<그냥 좋아/나태주>
나는 네가 더 예뻐지는 게 좋아
나는 네가 더 행복해지는 게 기뻐

나는 네가 더 예뻐지는 걸 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

나는 네가 더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따라서 기뻐하는 사람

이대로가 좋아
그냥 좋아

<꽃밭/나태주>
이뻐요
이쁘다고 말하는 사람 보면
나도 따라서 이쁘다

<트랜치코트>
아빠가 사 준
트렌치 코트

저녁 찬 바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옷깃을 여미니
아빠 생각이 난다

옷깃 여미는
나의 손에

아빠 마음이
먼저 와 있었다

<가을 햇살 아래/나태주>
가을 햇살은 겸손하고 부드럽다 부릅뜬 눈을 거두어 다감한 눈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
괜찮아 괜찮아 올해도 수고 많았지 조금씩 좋아질 거야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고 사람의 어깨를 쓸어 준다
가을 햇살은 우리에게 부드러움과 착함을 가르친다 올해도 가을 내가 살아서 다시 너를 만남이 행운이다

<앉아서 보는 바다/나태주>
앉아서 바다를 볼까? 서서 바다를 볼까? 앉아서 보는 바다는 키가 작고 서서보는 바다는 키가 크다
아니다
서서 보는 바다는 성난 바다이고 앉아서 보는 바다는 울고 있는 바다이다
바다야 바다야 울지 말아라 내가 옆에 있잖니
바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얌전해지기 시작하는 바다 파도의 손을 오래 만져준다 바다도 지그시 눈을 감는다

<고구마/나태주>
고구마 찐 고구마 먹으니 문득 목이 멘다 해마다 잊지 않고 고구마 보내 주는 사람 그 사람 생각에 더욱 목이 멘다

<작별/나태주>
안녕, 안녕 안 보일 때까지 안녕, 안녕 안 들릴 때까지 모퉁이 돌아 산 고개 넘어 물소리 될 때까지 바람 소리 될 때까지

<예쁨은 힘이 세다/나태주>
아, 저기 꽃이 피었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말은 하지만 아, 저기 꽃이 졌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피어 있는 꽃은 힘이 세다 살아 있음은 힘이 세다 예쁨은 더욱 힘이 세다

<노래 방울/나태주>
비 오는 날이지 날은 어둡고 우울하지 짜증도 나지 그렇다고 마음까지 비에 젖으면 안 되지
마음에 젖어드는 물방울들 튕겨 내야지 튕겨 내더라도 세차게 힘차게 리드미컬하게 튕겨 내야지 통, 통, 통, 통
그래, 비 오는 소리로 말이야 어두운 마음 우울한 마음은 모두 빗방울더러 가져가라고 빗방울에게 맡겨야지 끝내 우리는 환하고 밝은 맑은 날을 가슴에 품어야지
그래, 노래 방울이 되어야지 멀리까지 가는 메아리의 숲 새소리의 터널이 되어야지 얼마나 좋겠니?

<제민천 여름/나태주>
물고기래야 버들치 새로 새끼 친 어린 물고기들은 어린 물고기들대로 떼를 지어 다니고 어른 물고기는 또 한두 마리씩 쉬익 쉬익 물살을 휘젓고 다닌다
물고기 돌아와 물이 살아나고 개울이 살아나고 바람도 살아나도 하늘도 살아나고 사람까지 살아난다 따르르 따르르 우는 매미 소리조차 정겹다

<백목련/나태주>
해마다 봄이 오면 참으라고 조금만 더 기다렸다 나오라고 그렇게도 타일렀건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너무 일찍 나와 촐랑대다가 꽃샘바람 서리 맞고 시들어 버린 저 아이들
얼굴에 새하얀 분칠만 해 댄 철부지 저 아이들!

<흉터/나태주>
예쁜 다리 오금팽이 살짝 숨어 눈을 뜨고 있는 흉터 유치원 때 교통사고로 만들어진 흉터
볼 때마다 우리 아빠 마음이 아프다 그래요 볼 때마다 우리 엄마 보조개 같아 귀엽다 그래요
그래그래 그 마음이 사랑이란다 이다음에도 네 흉터 예쁘다 귀엽다 안쓰럽다 보아 주는 사람 만나서 살아라
네 마음의 흉터와 얼룩까지 감싸 주고 아껴 줄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란다

<새해/나태주>
너 본 지 오래다 일 년이나 지났네
너를 만난 건 지난해 12월 31일 오늘은 새해 1월 1일
날마다 만나도 보고 싶은 너 하루를 못 보면 일 년을 보지 못한 듯
날마다 만나며 살자 순간순간 만나며 살자 마음으로 그렇게 하자

<질문/나태주>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다 왜 시를 쓰고, 어떻게 해서 시를 쓰게 되었나요? 열여섯 나이 좋아하던 여학생 있었더란다 연애편지 쓰다가 시를 쓰게 되었지 연애편지는 어떻게 쓰나? 울렁이는 마음 고운 마음 사랑스런 마음 될수록 예쁘고 고운 말로 정성껏 다듬어서 쓰지 않더냐 그것이 바로 시 쓰는 마음이고 시란다 돈이나 물건을 얻는 것은 처음이요 사람을 얻는 것은 그다음이요 사람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란다 시란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 그 사람 마음을 내게로 데려오는 것 그게 제일 크게 얻는 것이고 제일 장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도 나는 열여섯 아이 연애편지 쓰듯 세상한테 연애편지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거란다

<두 번째 질문/나태주>
아이들한테서 두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시를 쓸 때 어디서 영감을 많이 받느냐고
그 대답은 자주 간단하지 나의 시는 길거리에 버려진 보석을 줍는 거니까 천지 만물, 그러니까 세상과 사람과 자연한테서 받지
나는 지금 너한테서도 영감을 받는 중이란다

<화통/나태주>
사람 마음은 걸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란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항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걸레가 처음부터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짓 잊는다 애당초는 깨끗한 것이었으나 더러운 것들을 닦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깨끗한 물에 빨아야 한다 대번에 나오는 대답이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도 마찬가지고 우리들 몸도 마찬가지 몸이야 날마다 목욕을 하거나 세수를 하면 되지만 마음은 어떡해야 하나? 시를 쓰는 것이나 읽는 것은 마음을 빠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면 사람들은 또 알아듣고 머리를 주억거린다 피차 화통한 일이다

<꽃 핀다/나태주>
없는 듯 있다가 꽃 핀다 죽은 듯 숨었다가 꽃 핀다 꽃 필 때에야 겨우 알아본다 여기는 살구꽃 조기는 복숭아꽃 저기는 진달래 그리고 철쭉꽃 그렇다면 너는 무슨 꽃을 피우고 싶으냐?

<어떤 봄날/나태주>
길을 잘못 들었단다, 시골길 시내버스 타고 가다가 내리지 않을 곳에서 내렸지 뭐냐
길을 잘못 들고 내리지 않을 곳에서 내리는 바람에 살구꽃 대궐로 핀 마을을 만났지 뭐냐
조그만 집 대문간에 나와 앉아 놀고 있는 예쁜 아이 하나 너를 또 만났지 뭐냐
그렇다면 말이다 길을 잘못 든 것도 끝까지 잘못한 일은 아니고 내리지 않을 곳에서 차를 내린 것 또한 끝까지 잘못한 일은 아니지 뭐냐

<최선/나태주>
올해도 봄이 와 꽃을 피우는 나무들 땅을 기면서도 꽃을 마련한 꽃풀들
그것들이 저들의 최선이다 목숨의 잔치, 최고의 사랑 최선, 최선, 박수갈채 깔깔 웃음이다
우리도 꽃을 피우자 꽃을 닮아 최선, 최선이 되자 봄, 그것이 되어 버리자

<사과로부터/나태주>
사과는 제가 사과인 줄도 모르고 익어야 정말로 사과라는 말이 있고 꽃도 제가 꽃인 줄 모르고 피어야 정말로 꽃이라는 말이 있단다
그러니 아이야 너도 너무 많이 아이이려고 하지 말고 너무 빨리 어른이 되려고 조바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지금은 아이이기만 하면 좋겠어
너무 많이 아이인 아이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아이 얼마나 징그럽겠니? 그건 어른들도 그렇단다

<오늘 하루/나태주>
자 오늘은 이만 자러 갑시다 오늘은 이것으로 좋았습니다 충분했습니다
아내는 아내 방으로 가서 텔레비전 보다가 잠들고 나는 내 방으로 와서 책 읽다가 잠이 든다
우리 내일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자 오늘도 안녕히! 아내는 아내 방에서 코를 조그맣게 골면서 자고 나는 내 방에서 꿈을 꾸며 잠을 잔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참 눈물겨운 곡절이고 서러운 노릇이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오늘 하루 좋았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 동안 이런 날 이런 저녁을 함께할 것인가!

<안녕/나태주>
저녁에 잘 때 안녕 아침에 깨어서도 안녕 아내에게 하는 인사
더러는 잠든 아내를 향해 혼자 내 방으로 자러 가면서 하기도 하고
불면증으로 잠이 멀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내에게 하는 인사
언제까지 그 인사가 이어지기나 할 것인지? 아침에 깨어서도 안녕!

<그럼에도 불구하고/나태주>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것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소망/나태주>
오늘도 하던 일 마치지 못하고 잠이 든다 아니다 오늘도 하고 싶었던 일 다 하지 못하고 잠이 든다
이다음 나 세상 떠나는 그날에도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 다 하지 못하는 섭섭함에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눈을 감게 될까?
하기는 오늘 다 하지 못하고 잠드는 일, 그것이 내일 나의 소망이 되고 내가 세상에 다 하지 못하고 남기는 그 일이 또한 다른 사람의 소망이 됨을 나는 결코 모르지 않는다

<가랑잎은 살아있다/나태주>
어려서 외할머니랑 둘이 오두막집 꼬작집 지켜서 살 때 가을만 깊어지면 뒤뜰 울타리에 가랑잎 부시럭대던 소리 밤중에는 더욱 크게 들리던 가랑잎 바람에 맨살 부비는 소리 아무래도 나는 가랑잎이 사람들처럼 살아 있어 가랑잎이 숨 쉬는 소리라 여겼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과연 그건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 내 몸의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살아서 들려오는 가랑잎 바람에 몸 부비는 소리 마른기침으로 친구하자 알은체한다

<나의 아내/나태주>
특별한 여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평생 한 남자의 인생만을 지킨 여자 그 여자가 바로 김성예랍니다

<못난 아들/나태주>
꿈속에서 어머니를 뵈었다 이러저러한 고비를 넘어 어머니 옆자리에 앉아 무명가수의 열창을 들으며 함께 즐거워했다 앞자리 청양 누이가 앉아 있어 누이에게 작은 용돈을 좀 주고 이어서 어머니에게 좀 넉넉한 용돈을 드리려고 가방을 뒤졌으나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돈 봉투가 보이지 않는 거였다 애가 타서 가방을 뒤져 돈 봉투를 찾다가 그만 어머니께 용돈 한 푼도 드리지 못하고 꿈을 깨어버렸다 어머니 그 나라에서 용돈이 궁해서 어떻게 지내시나 이렇게 나는 꿈속에서까지 못난 아들입니다 그래도 어머니 안색이 편하고 좋게 보여 그나마 좋았습니다 그 나라에서 지내시기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한 가운데서도 좋았습니다

<소년이여 조그만 꿈을 지녀라/나태주>
북해도 여행 갔다가 보았다 홋카이도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동상 동상 앞에 쓰여진 문장 보이즈 비 앰비셔스
백 년도 훨씬 전 일본 젊은이들 가르치려고 미국에서 왔던 클라크란 사람이 제 나라로 돌아가면서 남겼다는 문장 소년이여 대망을 가져라
물론 나도 그 말을 알고 있다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가슴에 오랜 세월 새기며 살았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이제 그 문장을 고쳐서 말하고 싶다 소년이여 조그만 꿈을 지녀라 조그만 꿈을 지니고 끝내 그 꿈을 이루어라 그것이 진정으로 그대의 성공이다

<통증/나태주>
가슴이 아파 숨 쉬기 버겁다 살며시 잠에서 빠져나온다 실눈을 뜨고 본다 어디선가 가랑잎 마르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매캐하다 언덕을 배경으로 낮은 초가지붕 오두막집이 떠오른다 황톳빛 진한 갈색이다 그 빛깔이 주변으로 번져나간다 둥그스름 무덤 몇 개가 보인다 무덤가에 연한 하늘빛 무릇 꽃대 가는 꽃대 가을 푸스스한 풀섶 사이 피어 있다 가들가들 흔들린다 자꾸 숨을 쉬어본다 바람 빠진 고무풍선에 바람을 넣은 것처럼 몸이 조금 채워진다 가슴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다 다시 사르르 눈을 감는다

<안부 전화/나태주>
지금 어디에 있어요? 누구하고 무엇하고 있나요? 예전엔 그렇게 물었는데
요즘은 다만 이렇게만 묻고 말한다
별일 없지요? 네, 이쪽도 아직은 별일 없어요

<마스크/나태주>
너와 나를 가른다
아니 너와 나를 합하고
너와 나를 살린다

<다시 포스트코로나/나태주>
빠르게 미끄럽게 거침없이 흘러가던 화면이 어느 날 멈칫 정지 화면이 되더니 천천히 슬로비디오로 흐르는 거였다 그런데 놀라워라 빠른 화면에서 보지 못하던 것들을 정지 화면 느린 화면에서 새롭게 보다니! 놀라워라 부끄러워라 나의 어리석음 나의 어설픔 나의 옹졸함과 사악함까지 시골 할머니들 콜라병이라고 부르는 코로나19가 우리를 새롭게 철들게 하는 것이었다

-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시집,   열림원, 202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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