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얼마나 억울했을까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3. 5. 20:13

<얼마나 억울했을까/한소>
텃밭을 일구겠다고 집을 마구 헤집어 놓았을때 너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삽 끝이 밀고 들어와 몸을 댕강 잘라놓아도 하소연 한마디 못한 너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집밖으로 내 던져져 이리저리 몸을 뒤집고 있는 가여운 너는

<가족/나태주>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방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래도 방 안은 하나도 좁아지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다시 자리를 고쳐 앉는다 여전히 방 안은 하나도 좁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말이 없다 서로 말 없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누구도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한 사람이 힘이 부치는지 기우뚱 몸을 숙이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없이 기울어지는 몸을 받아 안아주기도 한다
이윽고 날이 저물고 방 안이 어두워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환하고 따스하다
다만 한 지붕 아래 한 솥에서 지은 밥상 위에 때로는 한 이불 속에

<아름다운 짐승>
젊었을 때는 몰랐지 어렸을 때는 더욱 몰랐지 아내가 내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게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 채 지났지 사는 일이 그냥 바쁘고 힘겨워서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고 옆을 두리번거릴 짬이 없었지 이제 나이 들어 모자 하나 빌려 쓰고 어정어정 길거리 떠돌 때 모처럼 만나는 애기 밴 여자 커다란 항아리 하나 엎어서 안고 있는 젊은 여자 살아 있는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또 한 사람을 그 뱃속에 품고 있다니! 고마운지고 거룩한지고 꽃봉오리 물고 있는 어느 꽃나무가 이보다도 더 눈물겨우랴 캥거루는 다 큰 새끼도 제 몸속의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오래도록 젖을 물려 키운다 그랬지 그렇다면 캥거루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짐승 아니겠나! 캥거루란 호우의 원주민 말로 난 몰라요, 란 뜻이랬지 캥거루 캥거루, 난 몰라요 아직도 난 캥거루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봄의 세기는 씨 뿌리고 뿌리내리는 일에 영일(편안할寧日)이 없다. 여름 또한 그 씨앗을 잘 받들어 이파리와 줄기로 키울뿐더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에 바쁘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일단 일손을 멈추고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아, 내 업적이 저토록 왜소하고 초라한 것들이었던가! 이제 나는 가을의 세기를 넘어 겨울의 세기를 사는 사람이다. 바라보는 것마다 돋는 것마다 새롭지 않은 것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나에게 세상은 찬탄의 대상이다. 아, 나는 이제 길거리에서 만나는 애기 밴 여지한테서도 우주의 한 신비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잠시 눈물 글썽이는 노인이 되어 가고 있구나. 나이 들어감의 축복이여! 가득함이여!

<날마다 실연/나태주>
햇빛 고우면 가슴 울렁였고
바람 맑으면 발길 서성였다
누군가 한 사람 먼 곳에서
기다려줄 것만 같아서

그런 날이면 떠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붓꽃은 꽃대를 올려주곤 했다
겁도 없이 하늘에다 주먹질을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바다물빛 샅을
열고서

나, 날마다 새롭게
실연을 당하고 싶었던 때

- 나태주 시집 <한 사람을 사랑하여, 홍성사 刊> 중에서


<호미/안도현>
호미 한 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 평을 나는 농사라고 했는데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했다
나는 호미 자루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을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는 종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끔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헀다는 것은 오래 기억해 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은 입동 무렵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헛간 시렁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꽃밭의 경계/안도현>
꽃밭을 일구려고 괭이로 땅의 이마를 때리다가
날 끝에 불꽃이 울던 저녁도 있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로 삼으려고 돌을 주우러 다닐 때
계곡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공사장을 지나갈 때면 목 빼고 기웃거리고 쓰러지는 남의 집 됫박만 한 주춧돌에도 눈독을 들였어라

물 댄 논에 로터리 치는 트랙터 지나갈 때 그 뒤를 겅중겅중 쫓는 백로의 눈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렸어라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하였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
그렇다면 한낱 돌덩이가 꽃이라면 돌덩이로 가득한 이 세상은 꽃밭인 것인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아무 욕심이 없어졌어라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를 짓고 여기와 여기 아닌 것들의 경계를 가르는 일을 돌로 누를 줄 모르고 살아왔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는 다 소용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경계를 그은 다음에 꽃밭 치장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어라


<배차적/안도현>
평생 사내 등짝 하나 뒤집지 못한 여자가 마당 돌덩이 화덕에 솥뚜껑을 뒤집어놓는 날, 잔칫날이었지 불을 지피면 바삭바삭 엎드려 울던 잘 마른 콩깍지

속구배이 어구신 배추는 칼등으로 툭툭 쳐 숨을 죽여야 된다 호통치는 소리, 배차적을 부쳤지 가련한 속을 모르는 참 가련한 생을 가지런하게 뒤집었지 돼지기름 끓는 솥뚜껑 위에

배추전이 아니라 배차적,
달사무리하고 얄시리한 슬픔 같은 거

산등성이로 전쟁이 지나가는 동안 아랫도리 화끈거리던 밤은 돌아오지 않았고
멀건 밀가루 반죽이 많이 들어가면 성화를 내던 들판들, 무른 길들을 죽죽 찢어 먹던 산맥들, 고욤나무 곁가지 같던 손가락들

이마에 땀방울을 받아먹던 사그라지는 검불의 눈이 그래도 곱던 시절이 있었니더 아지매는 아니껴?

제삿날에는 퉁퉁 부은 눈동이로 썰어 먹던 배차적, 여자는 무꾸국처럼 하얘졌지

울진 영덕 봉화 영양 청송 영주 안동 예천 의성 문경 상주

가가호호 배차적 냄새가 송충이처럼 스멀스멀 콧등을 기어갔지.

- 안도현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2020 중에서

(사투리는 함부로 자신을 퍼뜨리지 않는다.
내성천 강변에 사는 나는 가만히 묻는다. 배차적을 어따 찍어 먹어야 하는지 아니껴? 양념간장이 아이시더. 배차적은 장물에 찍어 먹어야 하니더. 안도현 시인이 쓴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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