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4. 14. 06:17

<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최승호 시인의 강연 요약>

예술의 세계는 느낌의 세계가 아닐까? 학생들에게 시를 읽고 느낌을 써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안목이 있어야 한다. 시를 보는 눈이 없으면 많은 시를 써도 향상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그 수준에서 작품을 시작한다. 안목이 없으면 자기가 잘 쓰는지 못쓰는지 모른다. 심사를 할 수가 없다. 심사에는 척도가 있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심사를 할 수 있다. 심사를 하면서 난처한 경우도 있다.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안목은 읽기와 관련이 있다. 쓰기 전에 읽어야 한다. 이런 것이 좋은 작품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 공부가 끝난다. 안목이 안 생기면 백 편을 쓰고 오 년 십 년을 써도 향상이 없이 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시의 재료는 언어인데 언어가 공짜이다.

시를 많이 읽어야 안목이 생긴다. 책을 읽다 보면 작품을 보는 눈이 생긴다. 안목은 읽기에서 나온다. 고전을 읽으면 안목이 생긴다. 걸러내고 걸러내서 남아있는 게 고전이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 괴테, 보들레르를 읽으면서 안목이 생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웅덩이가 아닌가. 더 큰 거는 무얼까 생각하며 촉수를 넓혀야 한다. 안목을 갖추는 데는 고전 읽기가  필요하다. 좋은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고전을 많이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다. 시 안 쓰는 사람이 시인인가? 아니다. 수필을 안 쓰는 사람이 수필가 인가? 아니다. 시인은 시를 썩 잘 쓰는 사람이다. 대문장가가 되어야 한다.

안목 다음에 중요한 것이 문학적 역량이다. 문학적 역량은 어떻게 생기는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만의 작품 세계와 자기만의 스타일(문체)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가 작품세계이다. 그 사람 만의 스타일이 있는가? 본인은 5배 정도는 써야 5년 뒤에 쫓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헀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사북으로 갔다. 글쓰기는 좋은 곳이었다. 감옥 같은 곳이었으니까. 등단을 했으나 작품 세계가 없었고 스타일도 없었다. 등단한 다음에 5년 동안 문체연습을 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지? 어떻게 써야 하지를 고민했다. 남들하고 달라야 하니까…

‘조르주 루’라는 화가의 화집을 보면서 해설을 보면서 이 사람의 작품 세계는 무엇인지 눈여겨보자. 이 사람은 이런 세계구나 저 사람은 저런 세계구나. 보들레르는 랭보는 이런 세계고 김춘수 시인은 이런 세계고 등등. 나는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 고민해 보자.

조르주 루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연민’이 한 세계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주제로 한 세계고 또 하나는 ‘교만한 자들에 대한 경멸’이 세 가지이다. 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면서 ‘말 못 하는 것들’에 대해서 쓰자고 생각했다. ‘욕망에 대한 비판’, ‘세속 도시의 즐거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쓰고자 했다.

작품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하면 실력은 어디서 드러나는 가하면 문체 즉 스타일에서 드러난다. 문체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면서 등단하면서 5년 동안 문체연습을 했다. 최승호 시인은 28세에 오늘의 작가상에 당선되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해서 나온 결과였다.

시는 느낌의 예술이다. 지식이 아니다. 시 속에는 음악과 그림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시가 예술이다. 왕유의 시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 이미지즘이 그거이다. 시는 언어의 그림 같은 것이다. '나는 슬프다'는 형상화가 안되어있는 것이다. 이미지로 보여주어야 한다. 또 하나는 음악성이다. 음악성은 리듬에서 생긴다. 리듬은 반복에서 생긴다. 운문은 소리의 위치에 따라 반복하면 운율이 생긴다. 머리운 꼬리운을 맞춰보면 운율이 생긴다. 운을 맞추면 외우기가 쉽다.

<오솔길>
오소리가 다닌 오솔길을
오늘은 내가 걸어가네
오솔길 옆에 오갈피나무
오 누구시오?
다람쥐가 나를 처다보네

리듬이라고 하는 게 있다. 빠른 리듬이 있고 느린 리듬이 있다. 리듬 때문에 고민했다. 표현방법은 진술과 묘사이다. 진술은 말하는 것이고 묘사는 보여주는 것이다. 묘사 중심으로 가고 이미지 중심으로 가는데 감정의 농도를 어떻게 조절하는가도 생각해야 한다. 최승호 시인은 슬픔이나 눈물을 거의 못쓴다. 물기를 못쓴다. 그래서 최승호의 문체에는 물기가 없다. 최승호의 문체는 바짝 말린 문체이다. 리듬을 어떻게 할 거냐라고 생각하다 김수영의 후기 시를 접했다. 김수영 시인의 후기 시를 보면 리듬이 빠르다. 김수영의 시는 진술이다. 그의 시를 시이게 하는 것은 리듬으로 보인다. 김수영의 꽃잎이란 시도 리듬이 빠르다.

레이몽 끄노와 자크 프레베르의 시는 리듬이 엄청나게 빠르다. 이 리듬을 가져오자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가장 빠른 리듬을 가져가자고 생각했다. 리듬을 빠르게 가져가려면 줄이고 빼야 한다. 한국에서는 김수영의 후기 시와 이승훈 시인의 리듬을 참고해 보라. 레이몽 끄노와 자크 프리베르도 리듬이 빠르다.

안목이 있어야 하고 문학적 역량을 가져야 한다. 작품 세계를 가지자. 다음에는 문체연습을 하자. 문체는 이미지와 리듬이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한다. 문체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화가들은 계속 드로잉을 한다. 발레리는 20년 동안 침묵했다. 침묵하면서 고민하다 20년 후 해변의 묘지라는 작품이 나온다. 그의 시가 나오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나의 기다림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매혹이라는 시집에 해변의 묘지와 젊은 파르크라는 장시(긴 시) 두 편이 들어가 있다.

프랑스에 미셀 뜨루니에라는 소설가가 있다. 이 사람의 작품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다’라고 쓸 수 있다. 하지만 미셀 뜨루니에는 이렇게 썼다. 햇빛이 번데기에 닿으면서 나비가 되는 순간을 이렇게 썼다.

‘태양의 황금지팡이가 그 늙은 애벌레를 건드렸을 때 그 꿈틀거리던 대지적 존재는 천상의 존재로 화했다’

끝없이 문체연습을 해야 한다.

안목이 없으면서 열심히 쓰기만 하면 안 된다.

노트를 꺼내서 건질 게 있나를 보았더니 없더라.
2년 동안 매일 썼는데 건질 게 없더라.
자기 원고를 버릴 줄 아는 게 필요한 것 같더라.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노벨상을 받았는데 ‘끝과 시작’이라는 번역작이 나와있다.
심보르스카가 그랬다. 시 쓰는 데 필요한 것이 쓰레기 통이다. 지우는 것과 버리는 것이다. 첫 번째 쓰레기 통으로 가야 할 것은 설명, 두 번째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것은 수식과 형용사이다. 수식과 형용사는 버려야 한다. 수식은 한정 짓는다. (예)노란꽃, 노란 해바라기, 황금빛 해바라기 세 번째 버려야 하는 말은 관념어이다. 관념어와 추상어는 시에서 독이 된다. 행복, 희망, 절망, 이런 말 쓰기 시작하면 형상화가 안된다. 시는 버리는 작업이다.

또 시는 깎아야 한다. 시는 침묵의 조각술 같은 것이다. 시에서 중요한 건 여백이다. 시는 밸샘이다. 시는 쓸수록 줄여야 한다. 몇 자 안 남아야 한다. 가을바람이 잎사귀를 걷어가면 열매가 보이듯이 시는 줄여가야 한다.

시를 쓸 때는 가능한 적게 말하자. 그래야 시들이 자기의 메아리를 만들어 내지. 텅 빈 공간이 있어야 메아리치기 시작한다.

자기 스타일이 생긴 뒤 문체연습을 하면서 깎아내야 한다. 자코메티라는 조각가가 있다. 그가 몇 년 전에 서울에서 전시회를 했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아주 작다. 손바닥보다 작은 작품도 있다. 작업실도 작고 작업대도 좁다. 거기서 평생 작업했다.

줄이고 줄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것이 문체연습이다. 문학적 역량을 키우는 데는 쓰기가 필요하다.

문체연습은 열정이 없으면 못한다. 우리는 보람달이 되지 말자. 초승달이 되자고 했다. 초승달의 마음으로 초승달로 거대해지자라고 했는데 이것이 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우화집에 실린 ‘눈 사람 자살 사건’ 최우정 교수 작곡, 국립합창단에서 공연을 했다.
최우정 교수가 ‘마지막 눈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작곡했다.
눈사람 자살 사건 속에는
문학적 역량이 있다. 문체도 있고 작품 세계도 있다.

발상이 좋으면 작품 전체가 다 좋다. 발상의 전환의 대표적인 예가 ‘카프카의 변신’이다.

눈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발상이 제대로 된 것 같다. 아래는 '눈 사람 자살 사건'이다.

<눈 사람 자살 사건/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이것은 우화이면서 시이다. 이야기도 되고 시도 된다. 내용은 우화인데 형식은 시이다. 이미지가 있고 운율도 있다.

동화나 동시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는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를 썼다. 동화는 어린이들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어린이의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어린이의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동화나 동시를 어른들도 쓸 수 있다. 어린애 마음은 천진성이다.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시를 쓰다가 동시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쉬운 언어로 쓰면 된다.

원숭이/방시혁 작곡 노래

유튜브 마지막 눈사람으로 조회해 보자.

도롱뇽 도롱뇽 노래를 만들었어요 도레미파솔라시도… 방시혁 씨가 작곡했다.

시에 대한 울타리 고정관념을 버리자. 문자로 그림을 그려도 보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너무 잘 만들었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롭고 재미있고 즐겁게 시를 썼으면 좋겠다.

질문의 시-파블로 네루다가 쓴 시이다. 질문은 틀린 게 없다. 마음 놓고 질문을 하라.

시는 기본적으로 짧은 것이고 시는 생략의 문법 응축의 문법 함축 시키고 절제시켜야 한다. 이것이 시의 문법이다. 수필 시는 수필의 문법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이야기 시는 있다. 수필처럼 풀어놓고 쓰기보다는 이야기 시를 쓰는 게 어떻겠는가. 수필은 장르자체가 다르다. 이야기 시로 풀어보면 어떻겠는가.

백석은 시를 잘 쓴다. 리듬도 좋고 이미지도 좋다. 방언이 많아 어렵다. 함경도 평안도 방언이 나오니까 주석을 봐야 한다. 백석은 음식에 관련된 것을 굶은 사람처럼 많이 써놓았다. 우리말을 사랑한 것이다.
나의 조국은 프랑스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나의 조국은 한글이다. 시인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한글 속에서 태어났으니까. 한글 속에서 사니까! 시어 노트라는 게 있었다. 표정을 가진 말이 있다. (예) 삐쭉이나 무, 시어노트를 하나 만들어도 좋겠다.

베네수엘라는 시인들이 레퍼이다.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자기가 시를 쓰고 자기가 노래를 하고… 이런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렙을 의식한 동시를 써보면 좋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25곡을 썼다. 갯마을이라는 노래? 카툰 동시집을 낸 적도 있다. 웹툰 작가나 카툰 작가와도 함께 일해보았다. 예술가는 남이 안 한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걸어 다니는 로봇을 만들었다. 로봇을 차와 부딛히게 했다. 최초로 교통사고로 죽은 로봇이다.

벨레리의 시집 제목은 ‘매혹’이다. 매혹이라는 시집 안에 장(長) 시(詩) 두 편이 실려있는데 하나는 ‘해변의 묘지’이고 또 하나는 ‘젊은 파르크’이다. 4년 동안 100번 이상 고친 게 ‘젊은 파르크’이다. 20년의 침묵을 깨고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이게 해변의 묘지에 나온다.

제목: 전집, 내용: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겼다.(조개껍질이 두 쪽짜리 책이다,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 고민했다, 마침표를 찍었다.)

제목과 본문을 결합해야 한 편의 시가 되는 것도 있다. 제목: 대성당이 본문: 곧 파괴될 예정이다. 제목: 우리는 진토닉을 마셨다 본문: 그때 돌풍이 불었다.

<그늘/최승호>
모두들 그를 바보 영감이라 불렀다.
모두들 옳다.
그는 바보였고 집도 가족도 없었다.
어쩌다 교회당 옆 작은 목장에
일자리를 얻어
그는 날마다 건초 더미를 날랐고
우물에 눈을 져다 붓던 바보 성인처럼
마냥 즐겁게 소의 똥오줌을 퍼냈다.

이제 그는 누워 있다. 거적을 덮고
교회당 그늘 건초 더미 위에 나흘째.
바람이 반백의 더부룩한 머리를 쓸어주고
진눈깨비가 삐져나온 발등을 덮어준다.
성가대가 찬송가를 부를 때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연보주머니가 돌아다닐 때
사랑을 배우며
신자들이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때에도
그는 누워 있다.
거적송장이 되어.
동굴 안에 죽은 예수처럼
나흘째
부활하지도 않으면서.


<지하철 정거장의 노란 의자들/최승호>
땅속의 계단을 내려간다
어떤  죽음의 동굴을 내려가서
우리는 또 이렇게 붐비면서 망령들 속에 기다릴까
저승의 강가에 앉아
龍을 기다릴까
춥고 찌든 몽고족의 얼굴로
…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노란 의자
복권을 구겨버리고
…이 앉아 기다리는 노란 의자
이 지하철 정거장이
뚜렷한 희망의 개찰구로 뻗어 있다면
저리도 시무룩한 얼굴들이 아니다
설렘조차 없는 기다림
멋쟁이 뚜쟁이 같은 광고판
이윽고
구식 제복을 입은 기관사를 따라
줄줄이 얼빠진 얼굴 가득한 열차는 온다
저승의 강을 건너는 용선이 있다면
용선이 있다면 용선을 타고
영혼은 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북적거리던 한 무리가 휑하니 떠나면
돌고드름과
돌의 떡잎과
돌기둥들이 자라나는 텅 빈 동굴만큼이나
썰렁한 지하철 정거장
계단을 스물아홉 번 밟으면
스물아홉 순간 늙는 줄 모르면서
마흔 계단을 밟으면
마흔 순간 죽어가는 줄 모르면서
어느새 또
찌든 몽고족의 얼굴로 계단을 내려와
…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노란 의자
새로 산 복권을 들여다보며
…이 앉아 기다리는 노란 의자


<통조림/최승호>
나는 죽어서는 기꺼이 썩어지겠다.
대지는 거름이 필요할 테니까.
구름은 내 몇 됫박의 국물이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살아서는
내 앞에 가없이 펼쳐진 시간의 개펄을
발바닥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대지는 나의 거름,
구름은 몇 됫박의 국물을 거름에 부어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방
모든 문짝이 굳게 닫힌 밤 기슭의
벽 속에 있다.
천장 위를 요란하게 뛰던 쥐들이
죽어서 썩는 건지 며칠째
천장에 테를 넓히며 얼룩이 지고
파리똥과 쥐오줌과 거미줄로
얼룩진 천장에 내 넋을 음울하게 한다.
상표가 화려한 통조림
국물에 잠겨 있는 통 속의 송장덩어리,
웬만한 양념으로는 이미
이 맛은 변치 않는 삶은 송장맛이 아닐는지.


<밤의 힘/최승호>
폭풍우에 휩싸인 채
정전된 밤의 도시
검은 아스팔트 검은 강
상점마다 촛불이 가물거린다
번갯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그것은 번갯불로 충전된 도끼다
때리면 별들이 힘차게 빛난다
때리면 산이 쩌렁쩌렁 운다
때리면 난쟁이들즘이야
하지만 巨呻族(클巨끙끙거릴呻겨레族)이 아닌 이상 그런 도끼를
함부로 휘두를 만한 인간이 그 어디 땅 위에 있겠는가
번갯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채석장
혹은 옛날 스타일로
교미하는 용 한 상 얽힌 듯
질투하는 발톱 큰 용 한 마리 더 얽힌 듯
먹비늘을 긁어대는 빛의 발톱
먹비늘을 뜯어 내는 빛의 이빨
벼락불이 떨어진다 천둥이 친다

고압선이 얽힌 도시의 하늘을
내리찍는 불의 시퍼런 도끼
기억해 두자 저 얼크러져 꿈틀대는 밤의 힘
비록 내가
거신족의 식탁을 위한 한낱 재물에
혹은 밤이 낳고 밤이 먹는
밤의 아들에 불과하다 해도
세찬 빗발이 나를 두드리고
내가 다시 싱싱해지고
나의 두개골 안에
불타는 가시덤불의 거센 불길이
느껴지는 이 싱싱한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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