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130

나무야 너는

팔을 벌리고 하늘을 쓸고 있는 하늘빛에 젖어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주는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저 한 그루 나무와 같기를 나무야 너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한아름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며 반갑게 맞아주는구나 나무야 너는 팔을 쭉 뻗어 푸른 하늘을 껴안고 입맞춤하고 있구나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흰구름을 향해 반갑게 손짓하며 인사하는구나 새들이 지저귀며 하는 말 들어주고 있구나 사랑 이야기도 들어주고 하소연도 가만히 들어주는구나 태양이 너를 향해 말하는 소리를 귀담아듣는구나 나무야 네 마음은 하늘을 닮았구나

문학일기 2024.02.15

이해인 시인, 수녀님과의 두번째 만남

이해인 수녀님(시인)과 두 번째 만남(Zoom) 토론토 시간 2024년 2월 11일 19:30~21:30 한국 시간 2024 2월 12일: 9:30~11:30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해 강의와 대화 내용을 요약해 둔다. 빨강 그 눈부신 열정의 빛깔로 새해에는 나의 가족, 친지, 이웃들을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느님과 자연과 주변의 사물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습니다 결점이 많아 마음에 안 드는 나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렵니다 주황 그 타오르는 환희의 빛깔로 새해에는 내게 오는 시간들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내가 맡은 일들에는 인내와 정성과 책임을 다해 알찬 열매를 맺도록 힘쓰겠습니다 노랑 그 부드러운 평화의 빛깔로 새해에는 누구에게나 밝고 따스한 말씨 친절하고 온유한 말씨를 씀으로써 듣는 이를..

문학일기 2024.02.15

오늘을 위한 기도, 말을 위한 기도(이해인)

기도로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신록의 숲이 되어 오시는 주님 제가 살아 있음으로 살아있는 또 한번의 새날을 맞아 오늘은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할까요 제 작은 머리 속에 들어 찬 수천 갈래의 생각들도 제 작은 가슴 속에 풀잎처럼 돋아나는 느낌들도 오늘은 더욱 새롭고 제가 서 있는 이 자리도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오늘은 더 가깝게 살아옵니다 지금껏 제가 만나 왔던 사람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통해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심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길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제게 맡겨진 시간의 옷감들을 자투리까지도 ..

문학일기 2024.02.13

아침에 시 한 편(이성선, 최승자)

아이가 가재를 잡으려고 저녁 산골 개울에서 돌을 뒤집었다 돌 밑에서 가재가 아니라 달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달은 아이를 삼키고 집채보다 더 크게 자라서 동구 밖에 섰다 달의 뱃속에 지금 아이가 산다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그를 위해 몸을 비운다 기도 속에 촛불이 그림자 떨듯 그는 내 안에서 물을 길으며 노래한다 내가 하나의 갈대로 서서 사색하며 별을 지키는 밤에도 바람으로 아니 눈물을 넘어서서 나를 밟고 신비한 피리 분다 등잔이 비어 있을 때만 영혼의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는 춤이 보인다 그 밤에만 그에 귀를 밟히고 섰거니 나의 몸은 이 영혼을 모시는 사원 그를 위해..

문학일기 2024.02.13

아침에 시 한 편(이해인)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 머리를 빗질하다 보니 평생 무거운 수건 속에 감추어져 살아온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서 떨어지며 하는 말 이젠 정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도할 시간이 길지 않아요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깨우쳐 줘서 고맙다고 옷으며 대답한다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있다고 창밖에는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하고! 나를 부르고!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들게 하는 ..

문학일기 2024.02.13

갑신년 설날

지구촌 한쪽에서 먼 하늘 아래 어머니와 철희 미경 미정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오늘은 설날 동생과 권솔들 모여 어머님께 세배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드시겠지 나는 홀로 이곳 메이폴 팀호튼에 앉아 왁자지껄할 그 모습을 미리 그려본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도 나와 같은 마음이시겠지 한자리에 앉아 눈 마주 보며 도란도란 애잔한 마음 부둥켜안고 커피를 마신다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

문학일기 2024.02.09

아침에 시 한 편(기형도 이성선 최승자)

눈이 그친다. 인천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 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

문학일기 2024.02.09

설날 아침

때때옷 갈아입고 새 신발 신고 아버지 동생 함께 집을 나설 때 콧김이 새벽 공기 가르고 찬바람 옷 속으로 훅치고 들어오지만 기쁨이 한가득 싱글벙글 삐뚤빼뚤 과수원길 지나 고샅길 접어들면 할머니 계시는 큰집 “우리 신희 어서 와라.” 큰절로 세배하고 할머니 앞에 앉으면 ‘새해에도 건강하고 무럭무럭 잘 커라.’ 덕담해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 기도 덕에 이렇듯 잘 자라 할아버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을 사랑할수록 할 말은 적어지고 오랜 세월 시를 쓸수록 쓸 말은 적어지고 많은 말 남긴 것을 부끄러워하다가 마침내는 가장 단순한 침묵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긴 기다림 끝의 자유를 얻게 되나 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마법의 성에 온 지 수십 년이 지났어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사랑의 마법에 아..

문학일기 2024.02.07

내 마음

동터오는 해를 기다리다가도 막상 해가 떠서 눈이 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사랑한다 말하다가도 괜한 한마디에 금세 토라져 눈길을 피하는 내 마음은 비람에 흔들리는 저 작은 나뭇잎 산아래 붓꽃 한 자루 피어있다 한밤에 촛불 앞에 내가 앉아 있다 밖에서 돌아오면 나는 세상을 향해 이런 얼굴로 핀다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신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 한 강물이 내려 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나귀의 귀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음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

문학일기 2024.02.07

숨바꼭질

외딴집은 사과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어. 우린 거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지. 흙벽으로 만든 창고 문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열을 세었어, 하나 둘 셋 넷…. 열을 세는 동안 너는 숨을 곳을 찾아 몸을 숨겼지. 장독 뒤에도 숨고, 정지간 옆 장작더미 사이에도 숨고, 뒷간 모서리틈에도 숨었지. 너를 발견하고 창고 문으로 달려가 손바닥을 갖다 대면 너는 잡힌 게 억울하여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지. 걱정은 없었던 것 같아. 이제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욕심과 걱정과 주름이 늘었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찾지 못한 채.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의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여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

문학일기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