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140

아침에 시 한 편(백석, 김종삼, 도종환)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

문학일기 2024.01.19

선물

붉은 기운 하늘 물들이더니 떠오르는 해 반가워라 부신 눈으로 동녘 하늘 바라보네 새해맞이 해돋이 보려고 새벽부터 메이폴 팀호튼에서 기다렸나 보다 행운은 늘 이런 식으로 찾아왔지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내를 만난 것도 딸들을 안은 것도 손주를 만난 것도 영하 16도 추운 겨울 쌓인 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눈더미 사이로 붉은 태양 솟구쳐 오르네 온 우주를 껴안은 듯한 이 황홀감

문학일기 2024.01.17

마일스톤

낯선 곳으로 향하던 시선(視線)이 머문 자리에서 요람 속 리온이 보며 마일스톤*에 다시 이름을 새기네 작은 나무 한 그루 잎 돋고 가지 뻗어 쉴 그늘 내어 주듯 제영이 시온이 제준이 리온이... 나무마다 몸집 불리고 열매 맺어 세상을 이롭게 할 숲이 되리 숲이 되리 숲을 이루리 - 육십육 세 생일에 마일스톤에서 * Milestone: 표지석, 이정표-여행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돌에 목적지까지의 남은 거리와 방향을 새겨놓은 표지석을 의미한다. 또는 한 인생, 역사 등이나 수치상으로 중대시점, 획기적인 사건을 뜻하기도 한다.

문학일기 2024.01.16

눈 치우는 새벽

쌓인 눈이 비를 머금어 돌덩이가 되었네 곧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니 더 무거워질 테지 눈은 가볍지만 빗물이 더해지면 무거워지듯이 작은 죄라도 생각 없이 짓다 보면 더 큰 죄를 지어도 별 느낌이 없어지겠지 꼭두새벽에도 제설차가 다니며 길 위에 쌓인 눈을 밀고 가네 입구를 가로막은 산더미는 어떻게 치우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 그것까지 치워주고 가네 곤히 잠든 영혼들을 위해 저렇듯 수고를 하고 있네 나를 위해 이 새벽에도 기도하고 응원하며 돕는 손길이 있겠지 한 삽 한 삽 퍼 올려 눈을 치우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 훔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잠자리에 드네

문학일기 2024.01.13

길(道)

숲은 여윈 가지로 가득했다 지난밤 내린 눈이 낙엽을 덮어 눈밭이 되었다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눈 밟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갈랐다 아이젠에 끼인 눈이 절뚝이며 걷게 했다 시린 바람이 볼에 와닿았다 걷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걸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걷기로 한 게 옳은 결정이었다 올 한 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기를... 걷는 도중 아내가 힘들어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망막에 렌즈를 삽입한 영향도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삶은 날마다 걷는 일 일지도 모른다 갑진년 한해도 묵묵히 걸을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새해 첫날 숲으로 난 길은 설렘이 있는 선물이었다

문학일기 2024.01.03

기뻤던 순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초록색 운동복 입고 다니며 포근함을 느낄 때 기뻤지 백일도 안된 증손주 리온이 안고 눈맞춤 하시는 어머님 사진 볼 때 기뻤지 커뮤니티 센터에서 운동 끝낸 후 사우나에 들어가 비 오듯 흐르는 땀 훔칠 때 기뻤지 크리스마스 장식 제자리에 놓은 후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캐럴 들을 때 기뻤지 삶은 위대한 것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노래하는 메리 하트먼 시인의 시를 읽을 때 기뻤지 휴가 차 한국을 방문 중인 작은딸 가정이 제주도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 들을 때 기뻤지 버펄로에서 알게 된 지인이 제영 엄마로 불러도 될 자신을 구태여 이 교수님이라고 부른다며 겸연쩍게 말하는 큰딸 이야기 들을 때 기뻤지 권여선 님의 ‘사슴벌레식 문답’에 나오는 경애와 부영, ..

문학일기 2023.12.22

멈추고 듣는 것 멈추고 바라보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을 경청이라 했던가. 90년대 초 몇 년간 신입사원 후배들을 대상으로 ‘직장예절’이라는 과목을 강의했었다. 교육 내용 중 경청을 강조하는 장(chapter)이 있었다. 소통하려면 먼저 경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청과 소통에 대해 강의까지 한 나였지만 스스로 대화 중 얼마나 경청하는지 생각해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다. 상대가 이야기할 때 진정으로 귀 기울이고 공감하며 반응하기보다 상대의 말을 받아서 어떻게 응수할까를 더 많이 생각했던 듯하다. 들으려면 멈추어야 한다. 멈추지 않으면 경청할 수 없다. 생각을 멈추고 상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이어 무슨 말로 응수할까 궁리하면 이미 경청에서 저만큼 멀어져 있다. 새소리를 들으려..

문학일기 2023.12.20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크리스마스가 코 앞인데 큰 추위 없이 지내왔다. 올 겨울 날이 따뜻해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크리스마스에 눈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젯밤 눈이 내렸다. 차고 앞 주차장에 얇게 쌓인 눈을 치우고 메이폴 팀 호튼으로 왔다. 눈 내리는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메리 하트먼(Mary R. Hartman) 시인의 시를 읽는다 시인은 삶은 크고 위대한 것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노래한다. 잦은 웃음과 따뜻한 위로의 말들이 우리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운단다. 오늘 하루도 자주 웃고 가족과 친구들, 이웃에게 따뜻한 미소와 함께 위로의 말을 건네며 살자. -Mary R. Hartman Life’s made up of little..

문학일기 2023.12.19

미국의 시인들 1

미국의 시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다만 몇 편이라도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읽고 있다. 이해인, 정채봉, 안도현 시인의 시도 읽는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거짓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성공이다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문학일기 2023.12.15

형 이경희 형 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으로 보여주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행동으로 말해 주었어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표정으로 몸짓으로 보여주었어 일주일 입원해서 그 힘들다던 항암 치료를 끝내면 격리하며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지 격리 중에도 늘 감사하고 감사했어 감사할 일이 어쩌면 그리 많을 수 있는지 병원을 나오면 매 주일 노숙자들을 찾아갔어 한 끼 식사를 나누어 주며 사랑한다고 말했지 아픈 중에도 매주 줌을 연결하여 토론토 동생에게 복음과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해주었어 옥 중에 있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10대는 물론이고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에도 지금 내가 60대에 이르기까지 나침판이 될 교훈들을 마음 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주었지 내 삶의 이정표가 ..

문학일기 202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