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이해인 시인, 수녀님과의 만남(1)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3. 11. 1. 06:05

<이해인 시인, 수녀님과의 만남/ 2023년 토론토 시각 10월 29일 저녁 8시, 한국시각 10월 30일 오전 9시, zoom을 통하여>

요즈음 나는 이런 다짐을 하면서 산다. 첫째는 더 이상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달라는 기도는 이제 하지 않고 감사하는 기도 찬미하는 기도만 해야겠다. 위로의 편지가 되어야겠다. 위로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둘째는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감탄하며 살겠다. 식탁에 앉아서 밥 먹으면서도, 산책하면서도 춤을 추는 마음으로 경이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

함민복 시인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일가친척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겠다고 했는데 나 역시 세상 모든 사람을 일가친척으로 여기고 사랑의 인사를 건네며 살려고 노력한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려 애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일가친척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하다 보니 길 위의 낯선 만남도 낯설지 않다.

세 번째는 자신의 실수나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약점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겠다. 본래의 나인 것처럼 실수나 약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드러낸다. 그렇게 하니까 편안하고 자유로워졌다.

네 번째는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변명하면서 합리화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산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순한 마음을 가지려 애쓴다. 나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가는 순례자인데 용서 못 할 일이 무엇인가.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이 나를 훈련하는 장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루하루가 하나의 새로운 길이라 생각하고 오늘 하루가 남은 날들의 첫날이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내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는데 산과 같은 영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요즈음 뇌에서 기억이 자꾸만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공부한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함께하고, 초심을 잃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

광안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뒤로는 산이 있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 소속 수녀원에 살면서 가끔 강연하러 다니기도 한다. 최근에는 ‘인생의 열 가지 생각’이라는 산문집과 ‘햇빛 일기’라는 시집을 냈고 서울에서 있은 북콘서트에 다녀오기도 했다.

64년에 수녀원(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했으니 60년 가까이 수녀로 살고 있다. 사랑받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다.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독자들과 만나기도 하는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

<생활 속의 시와 영성>
- 쓰는 사람 따로 있고 분석하는 사람 따로 있나 보다. 나는 쓰는 사람이다.
- 나는 소소한 일상을 노래한다.
- 아프고 슬픈 사람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고 싶다.
- 아프기 전의 생각과 아픈 후의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글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시 치료 워크숍에도 참여해 본 적이 있다.
- 나는 시를 옮겨 적거나 나누어 주고 사람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읽기도 한다.
- 편지 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 수녀원에서 단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짬짬이 책을 본다. 주로 시집을 많이 읽는 편이다. 잠들기 전에도 읽는다.
- 해인 글방은 기쁨을 주는 공간이다.
- 단체 생활을 하면서 절제와 순종의 삶을 산다. 어떤 때는 계란 프라이라도 마음 놓고 편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련과 시련 속에서 글이 나오고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 이해인의 서재는 마법의 성이다.
- 본명은 명숙인데 필명을 해인이라고 지었다. 바다 해(海)에다 어진 인(仁) 자를 썼다. 광안리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으니, 필명을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 아프고 난 뒤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는다면 고통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고 할 것이다. 넓은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고 믿는다.
- 시상은 언제 나오며 언제 주로 쓰는지?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메모하는 편이다. 메모해서 모아두었다가 정리한다. 컴퓨터로 쓰지 않는다. 나만의 노트가 있다. 나만의 노트가 글을 쓰게 한다. 메모했다가 시간이 될 때 펼쳐서 정리한다. 더디게 쓰는 시는 3년이 걸리기도 하고 금방 나오는 시도 있다. 끊임없이 메모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 ‘here and now’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매일 마음을 비우면서 산다. 없는 것처럼 산다.

인생책을 꼽으라면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꼽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구를 읽으면 마음이 맑고 평화로워진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와 그 시집에 실린 시들은 나의 시작(詩作)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타고르의 ‘기탄잘리’이다. 영혼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 주고 종교적 심성을 키워준 책이다. 세 번째로 꼽고 싶은 책은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이다. 조개껍질을 가지고도 어떻게 저런 명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네 번째는 논어이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 읽곤 한다. 문고판이라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짧지만 깊이 있는 진리가 담긴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원복 교수가 쓴 먼 나라 이웃나라를 들고 싶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도움을 준다. 쉽게 읽힌다.


<말의 빛/이해인>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낡은 구두/이해인>

내가 걸어 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 준
고마운 그를


<마음에 대하여/이해인>

마음 찾기
1
숨어 있기 싫어서인가?
가끔은 내 마음도
집 밖으로 외출을 한다

그가 빨리 돌아오지 않아
내내 불편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괴로웠다

2
내내 밖으로 서성이다
오랜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마음이여 고맙다

네가 가출한 동안은
단순한 일도 순에 안 잡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면서 기도해도
대답 없던 시간들

네가 돌아와
나의 삶은 다시
기쁨이 되었다

주인인 내가 너무 무관심해서
화가 났다구?
이젠 나도 잘할게

다시 만난 기념으로
아침엔 녹차 한잔
저녁엔 포도주 한잔 할까?


<친구야 너는 아니/이해인>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사람들끼리 사랑을 하고
이별하는 것도
참 아픈 거래

친구야, 봄비처럼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픈 내 맘 아니
우리 눈에 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지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서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봄비처럼 고요하게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 싶은 내 마음
너는 아니?
향기 속에 숨긴 나의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너는 아니?


<건조주의보/이해인>

‘영남지방엔 건조주의보
산불 나지 않을까 각별히 조심’

신문의 기사를 보는 순간
내가 나에게 주는 말

‘내 마음도 건조주의보
감동 없는 삶을 살지 않도록 유의’

그래서 늘
물이 그립다

물이 있어야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져야
눈물도 흐리지


<시간 쓰기/이해인>

시간 없어 바쁠 땐
내내 시간 시간 노래하며
무작정 여유를 아쉬워하다

막상 시간이 많아지면
오히려 바쁠 때가 낫다고 한다

바쁠 적에 잠시 잠시
살뜰히 챙겨 쓰던
자투리 시간들이
더 그립다고 한다


<잘못된 관계>

한번 넘어져서 뼈들이
서로 어긋나니
정확히 맞추기가 힘이 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시간과 공이 많이 드네

사람과의 관계도 한번 어긋나면
다시 맞추기 꽤나 힘들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려면
시간과 정성을
아주 많이 들여야 하고…
그러니 처음부터 잘해야 해


<어떤 결심/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마음산책)에서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이해인>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가을 노래/이해인>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서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가을 바람/이해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는 눈수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가을 일기/이해인>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을의 시작부터 시로 물든 내 마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너를 향한 그리움인 것을
가을을 보내며 비로소 아는구나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너에게
가을 내내 단풍 위에 썼던
고운 편지들이 한 잎 한 잎 떨어지고 있구나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을
나는 어느새 기다리고 있구나


<가을편지 1/이해인>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가을 편지/이해인>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심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가을편지/이해인>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을비에게/이해인>

여름을 다 보내고
차갑게
천천히
오시는군요

사람과 삶에 대해
대책 없이 뜨거운 마음
조금씩 식히라고 하셨지요?

이제는
눈을 밝게 뜨고
서늘해질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시는군요

당신이 오늘은
저의 반가운
첫 손님이시군요


<가을빛/이해인>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나뭇잎 러브레터/이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나뭇잎 한 장이
나의 가을을
사랑으로 물들입니다

나뭇잎에 들어 있는
바람과 햇빛과
별빛과 달빛의 이야기를
풀어서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 장의 나뭇잎은
또 다른 당신과
나의 모습이지요?

이 가을엔 나도
나뭇잎 한 장으로
많은 벗들에게
고마움의 러브레터를
쓰겠습니다


<코스모스/이해인>

몸 달아
기다리다
퍼어 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 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주신 노래는
아직도
앍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가을 하늘/이해인>

맑고 푸르게
웃기만 하는
하늘은 천국

그 아래서
누구도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느님마저도
거기 계시다

모질게
야단치지 않고도
나를 참회하게 만드는
하늘은
나의 사랑


<들국화/이해인>

웃음 잃고 피어난 연보랏빛 꽃
하늘만 믿고 사는 푸른 마음속에

바람이 실어다 주는
꿈과 같은 얘기

멀고 먼 하늘 나르는  얘기
구름 따라 날던
작은 새 한 마리 찾아주면

타오르는 마음으로
노래를 엮어

사랑의 기쁨에 젖어보는
자꾸 하늘을 닮고 싶은 꽃

오늘은 어느 누구의 새하얀 마음을
울려주었나

또다시 바람이 일면
조그만 소망에
스스로 몸부림치는 꽃


<낙엽/이해인>

낙엽은 나에게
살아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 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며 살아야겠다


<단풍나무 아래서/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이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가을 산은/이해인>

가을 산은
내게 더 가까이 있고
더 푸르게 있다

슬픔 가운데도 빛나는
내 귀한 연륜

시시로
높은 산정 오르며
생각했지

눈 감으면 보이고
눈 뜨면 사라지는
나의 사랑

하 그리운 고운 언어들
많이도 잊었지만
은총의 빛 얻어
슬프지 않은

가을날
희게 손을 씻고 뛰어가는
당신의 언덕길

덧없어 숨이 차 옴은
그게 다 어린 탓이라고
혼자 생각해

마음 더욱
가만히 키워
고개를 들면

가을 산은
내게 더 가까이 있고
더 푸르게 있다


<가을의 말/이해인>

하늘의 흰 구름이
나에게 말했다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느 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가을 뜨락의 석류가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라
잘 익어서 터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가을 편지/이해인>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가을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는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 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11
누구나 한 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워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12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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