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아이 150313 시들어 가는 수선화 몇 포기를 선물로 받았다. 팔을 떨어뜨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묻어두면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했다. 시베리아 못지 않은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싶었다. 반 뼘도 안되는 틈새에 구겨 심고 잊어버렸다. 긴긴 겨울을 지나보낸 어느 봄날이었다. 연녹색 촉이 .. 문학일기 2015.03.13
대접 150312 지인의 동인지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려 하였다.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몰라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다음날 먼발치에서나마 얼굴을 대하니 반가웠다. 시인의 아내가 수줍은 미소로 다가와 시집을 전해주었다. 읽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한 편의 시에 우주가 .. 문학일기 2015.03.13
대지(大地)의 울음 150310 빼곡하던 나무가 하나둘 뽑혀 나간다. 건장한 사내들이 다가가 전기톱을 몸통에 대고 드르륵 돌리자 피를 뿌리듯 톱밥이 튕겨 나온다. 쓰러진 둥지는 겅중겅중 잘려 토막이 되어 나뒹군다. 엮어진 잔가지가 한 두름이다. 집채만 한 굴착기가 땅속에 남은 뿌리를 푹푹 뽑아낸다. 꼭꼭 숨었.. 문학일기 2015.03.11
엄마의 손맛 150308 “어, 이건 엄마가 해주던 음식인데….” “이건 우리 집에서 쓰던 그릇이야. 이상하다, 이럴 수가….” 유학생을 식당으로 초대하여 자신의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게 하였다. 실제로 엄마가 현지로 날아가 자녀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그릇까지 집에서 사용하던 것을 공수해 상을 차렸.. 문학일기 2015.03.09
거시기 150307 데이트도 할 겸 아내와 코스트코(COSTCO)에 갔었다. 크루아상(croissant) 한 상자를 사 왔다. 열두 개가 들어있었다. 어찌 보면 커다란 달팽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소똥 같기도 한 것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다시 보니 좁아터진 닭장 속 닭 같았다. 저걸 언제 다 해치울까 싶어 은근히 부담도 .. 문학일기 2015.03.08
소년소녀 가장 150306 머리를 치켜들고 누구를 기다리는가. 좋은 땅 다 놓아두고 어쩌자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가에 피었나. 언덕에 쌓인 눈은 너를 더욱 또렷하게 한다. 모진 바람 눈보라 견디며 흔들리는 너는 휘어지는 법부터 배웠구나. 차들이 지나가며 튕겨내는 얼음물 세례도 당연한 듯 뒤집어쓰며 긴.. 문학일기 2015.03.07
시작이 끝 150305 트레드밀 위에서 걷기를 시작하였다. 이십여 분이 지나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좀 더 걸으니 비 오듯 했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져 날아갈 것 같았다. 더 걷고 싶었으나 약속 시각에 맞추려면 끝내야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점심시간이면 반쯤 남은 도시락을 급하게 까먹고.. 문학일기 2015.03.05
메이크업 아티스트 150304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다. 그늘에서 일해서 그럴 것이다. 손님이 들어오면 내장을 들어내고 방부처리를 한다. 교통사고로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의 시신이 들어오는 날이면 밀가루 같은 것으로 얼굴을 만들어 붙인다. 그럴 땐 사진이 한몫을 한다. 혹이나 잘못되어 상주조차 얼.. 문학일기 2015.03.05
고목 등걸 150303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작대기를 짚은 할머니는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면서도 줄을 서서 커피를 샀다. 미리 자리를 잡고 앉은 할아버지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 한 잔과 물 한 병 그리고 해시 브라운이 그들의 아침 식사.. 문학일기 2015.03.03
동전 한 닢 150301 키가 크고 콧날이 오뚝한 청년은 뉴욕 양키즈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구레나룻도 길렀다. 말은 좀 어눌한 듯했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계산을 끝내고 계산대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장대만 한 키의 멀쩡한 신사.. 문학일기 2015.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