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기형도 이성선 최승자)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2. 9. 11:25

<백야/기형도>
눈이 그친다. 인천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 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조치원/기형도>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빙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앟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몃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라.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이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엄마 걱정/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가을 무덤/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영하(떨어질零아래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란 단발머리고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짖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물河입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을 앓는 중풍환자로 태어나 전신에 땀빵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솔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사랑하는 별 하나/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 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환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 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싶다


<산길/이성선>
산길은 산이 가는 길이다
나의 몸은 내가 가는 길
모자 쓰고 저기 구름 앞세우고
산이 나설 때 그 모습 뒤에서
길은 우뢰를 감추고 낙엽을 떨군다
산의 가슴속으로 현(악기줄絃)처럼 놓여서
바람이 걸어가도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도 자취를 숨긴다
그것은 또 소 뿔에도 걸리지 않는
달이 가는 길
바람에 씻지 않은 발은 들여놓지 않는다
귀와 눈이 허공에 뜨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눈 오는 저녁을 간직한다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와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이제 가야만 한다/최승자>
때론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는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구명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 몸 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내가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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