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갑신년 설날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2. 9. 23:48

<갑신년 설날/한소>

지구촌 한쪽에서
먼 하늘 아래 어머니와

철희 미경 미정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오늘은 설날
동생과 권솔들 모여

어머님께 세배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드시겠지

나는 홀로 이곳 메이폴 팀호튼에 앉아
왁자지껄할 그 모습을 미리 그려본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도
나와 같은 마음이시겠지

한자리에 앉아 눈 마주 보며
도란도란

애잔한 마음 부둥켜안고
커피를 마신다
먼 하늘을 바라본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 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나리 나리 개나리/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 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라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생명/이성선>
바닷가에서 작은 조가비로
바닷물을 뜨는 아이처럼
나는 작은 심장에 매일
하늘을 퍼 뜬다

바다 아이가 조가비에
바다의 깊은 물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허파도
하늘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나 조개껍질에 담긴 한 방울 물이
실은 바다 전체이듯
가슴속에 담긴 하늘 또한
우주 전체이다

<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이성선>
땅에 누은 것들은 모두 싱싱해진다
썩을수록 무(無) 가까이서 맑아진다

잎 떨어진 가지 사이로 보니
구름이 산을 밟았구나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구나

구름 밟은 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
저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어디로 가고 있는 나무다

서 있으면서 가고 있는 산
풀잎도 여기 앉아서 구름 냄새가 난다

내가 죽으면 어떤 냄새가 날까
나뭇잎 떨어져 햇살에
몸 말리는 냄새?


<일찌기 나는/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중구난방이다/최승자>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 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빼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 휘저으며 물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 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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