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이해인>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
머리를 빗질하다 보니
평생 무거운 수건 속에
감추어져 살아온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서
떨어지며 하는 말
이젠 정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도할 시간이
길지 않아요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깨우쳐 줘서 고맙다고
옷으며 대답한다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있다고
창밖에는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하고!
나를 부르고!
<꽃 잎 한장처럼/이해인>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 까지
<내가 나에게/이해인>
오늘은 내가 나에게
칭찬도 하고 위로도 하며
같이 놀아주려 한다
순간마다 사랑하는 노력으로
수고 많이 했다고 웃어주고 싶다
계속 잘하라고 힘을 내라고
거울 앞에서 내가 나를 안아준다
-시집<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에서
<내가 나에게 2/이해인>
오늘은 오랜만에
내가 나에게 푸른 엽서를 쓴다
어서 일어나 섬들이 많은 바다로 가자고
파도 아래 숨쉬는
고요한 깊이 고요한 차가움이
마침내는 따뜻하게 건네오는
하나의 노래를 듣기 위해
끝까지 기다리자고 한다
이젠 사랑할 준비가 되었냐고
만날 적마다 눈빛으로
내게 묻는 갈매기에게
오늘은 이렇게 말해야지
파도를 보면 자꾸 기침이 나온다고
수평선을 향해서 일어서는 희망이
나를 자꾸 재촉해서 숨이 차다고
-시집 <작은 위로>에서
<맛있는 기도/이해인>
내 맘속에 숨어 살며
떠나기 싫어하는
어떤 슬픔 하나를
과자로 만들어
기도속에 넣어둡니다
내가 좋아하는
웨하스 크레커처럼
바삭바삭 담백하고
맛이 고소해요
내 마음에 안들어
비켜가고 싶던
어떤 미움하나
음료수로 만들어
기도속에 넣어둡니다
내가 좋아하는
레몬즙처럼
쌉싸름 상큼하고
맛이 향기로워요
<어떤 결심/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시집 ‘희망은 깨어있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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