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오늘을 위한 기도, 말을 위한 기도(이해인)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2. 13. 23:39

<오늘을 위한 기도/이해인>
기도로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신록의 숲이 되어 오시는 주님
제가 살아 있음으로 살아있는
또 한번의 새날을 맞아
오늘은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할까요

제 작은 머리 속에 들어 찬
수천 갈래의 생각들도
제 작은 가슴 속에
풀잎처럼 돋아나는 느낌들도
오늘은 더욱 새롭고
제가 서 있는 이 자리도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오늘은 더 가깝게 살아옵니다

지금껏 제가 만나 왔던 사람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통해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심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길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제게 맡겨진 시간의 옷감들을
자투리까지도 아껴쓰는
알뜰한 재단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기 싫지만 꼭 해야할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밖에는 없는 것처럼 투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이 제 안에 항상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제가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할 때는
사랑의 거울 앞에 저를
비추어 보게 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과 비교하느라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오늘을 묶어 두지 않게 하소서

몹시 바쁜 때일수록
잠깐이라도 비켜서서
하늘을 보게 하시고
고독의 층계를 높이 올라
내면이 더욱 자유롭고 풍요로운
흰 옷의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극히 조그만 것이라도 다 기억하되
제가 남에게 베푼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망증을 허락하소서

오늘 하루의 숲속에서도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는
어느 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나직이 외우는 저의 기도가
하얀 치자꽃 향기로
오늘의 잠을 덮게 하소서. 아멘.


<말을 위한 기도/이해인>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에 하소서

제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내뱉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하고
좀 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봄 편지/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기쁨의 맛/이해인 수녀>
바람에 실려
푸르게 날아오는
소나무의 향기 같은 것

꼭꼭 씹어서 먹고 나면
더욱 감칠맛 나는
잣의 향기 같은 것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할 때의
평화로움 같은 것

누가 나에게
싫은 말을 해도
내색 않고
잘 참아냈을 때의
잔잔한 미소 같은 것

날마다 새롭게
내가 만들어 먹는
기쁨 과자
기쁨 초콜릿
기쁨 음료수

그래서 나는
평생
배고프지 않다


<혼자 웃는 날/이해인>
아무도 몰래
혼자서 가만히
웃어볼 때가 있어요

내가 누구를 진심으로
용서했을 때 본성적으로 화나는 일을
언성 안 높이고
침착하게 참아냈을 때

그리고
먼저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지만
눈치껏 알아듣고
구체적인 도움으로
어떤 한 사람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살려낸
위로천사의 몫을 했을 때

난 스스로 대견해
성당에서 마당에서
혼자 웃어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작은 기쁨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닌
사랑의 수고임을
오늘도 새롭게 공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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