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이성선, 최승자)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2. 13. 23:29

<신화/이성선>
아이가 가재를 잡으려고
저녁 산골 개울에서 돌을 뒤집었다

돌 밑에서 가재가 아니라
달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달은 아이를 삼키고
집채보다 더 크게 자라서
동구 밖에 섰다

달의 뱃속에 지금 아이가 산다


<영혼의 침묵/이성선>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그를 위해 몸을 비운다
기도 속에
촛불이 그림자 떨듯
그는 내 안에서
물을 길으며 노래한다
내가 하나의 갈대로 서서
사색하며
별을 지키는 밤에도
바람으로 아니 눈물을 넘어서서
나를 밟고 신비한 피리 분다
등잔이 비어 있을 때만
영혼의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는 춤이 보인다
그 밤에만 그에 귀를 밟히고 섰거니
나의 몸은 이 영혼을 모시는 사원
그를 위해 여기 돌아와 섰다
그가 타오르면
조금씩 나를 하늘로 길어가고
다시 우주의 침묵을 내려
내 등잔을 채우는 시간
나는 이 땅에 떠 있는 석등
조용히
그를 불 밝히는 그릇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듯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네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파괴의 집/최승자>
사방팔방으로 바람, 바람 소리
바람 파도에 포위된 집,
누울 곳 없는 삼십칠 세

없는 꿈과 있는 현실,
그 사이에서 바람…
바람 소리가 날 흔들어댄다

영원히 뿌리 없는
허공의 방, 허방의 집

허망하고 허망하여
이 집을 파괴합니다
이 집을 복원하지 마십시오
행여, 이 위에 기념 건물을 세우지 마십시오
명실공히, 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