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숨바꼭질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2. 5. 22:40

<숨바꼭질/한소>
외딴집은 사과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어.
우린 거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지. 흙벽으로 만든 창고 문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열을 세었어, 하나 둘 셋 넷….
열을 세는 동안 너는 숨을 곳을 찾아 몸을 숨겼지. 장독 뒤에도 숨고, 정지간 옆 장작더미 사이에도 숨고, 뒷간 모서리틈에도 숨었지.
너를 발견하고 창고 문으로 달려가 손바닥을 갖다 대면 너는 잡힌 게 억울하여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지.

걱정은 없었던 것 같아.

이제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욕심과 걱정과 주름이 늘었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찾지 못한 채.


<새해의 기도/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의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여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감각/랭보(1854~1891)>
여름날 푸른 저녁에 나는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몽상가가 되어 발밑으로 그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
하지만 한없는 사랑은 내 영혼에서 피어오르리니
나는 멀리멀리 가리라, 보헤미안처럼
여인과 함께 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여울/김종길>
여울을 건넌다.
풀잎에 아침이 켜드는
개학(開學)날 오르막 길.
여울물 한 번
몸에 닿아 보지도 못한
여름을 보내고,
모래밭처럼 찌던
시가(市街)를 벗어나,
길경(桔梗)꽃 빛 구월(九月)의 기류(氣流)를 건너면,
은피라미 떼
은피라미 떼처럼 반짝이는
아침 풀벌레 소리.


<들녘/정채봉>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한 알의 사과 속에는/구상>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大地)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강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집/유승도>
내 집 속의 땅바닥 틈새엔 쥐며느리의 집이 있고 천장엔 쥐들의 집이 있다 문밖을 나서면 집 앞의 나무 위에 까치의 집이 있고 문 앞의 바위 밑엔 개미들의 집이 있고 텃밭엔 굼벵이들의 집이 있다 산은 나무들의 집이다 나무 사이엔 새들과 숱한 곤충들의 집이 있다 들판은 풀들의 집이요 시내는 물고기의 집이다 하늘의 구름의 집이요 우주는 들들의 집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의 집이다


<새마다 하늘/롭상로르찌 을지터그스(몽골)>
풀은 모두 나무
돌마다 산
넓은 이 세상
사물은 모두 중심

깃은 모두 새
새마다 하늘
풍요로운 이 삶의
모든 날들이 새롭다


<나는/롭상로르찌 을지터그스>
산을 보면 나는 산
안개와 연무를 보면 구름
이슬비가 내린 뒤의 풀
종달새가 노래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아침
나는 사람만이 아니다


<같은 내면/안나 스위르(폴란드)>
사랑의 축제를 위해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길가에서
한 늙은 거지 여인을 보았네
그녀의 손을 잡고
섬세한 빰에 키스를 했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녀는 나와 똑같은 내면
개가 냄새만으로
다른 개를 알아보듯이
우리가 같은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알아챘네
그녀에게 돈을 주고 나서도
나는 그녀 곁을 떠날 수 없었네
어떻든 사람은 친밀감을 나눌
구군가가 필요하지
그러자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갈 이유를
알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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