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한소>
동터오는 해를 기다리다가도
막상 해가 떠서 눈이 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사랑한다 말하다가도 괜한 한마디에
금세 토라져 눈길을 피하는
내 마음은 비람에 흔들리는
저 작은 나뭇잎
<붓꽃/이성선>
산아래 붓꽃 한 자루 피어있다
한밤에 촛불 앞에
내가 앉아 있다
밖에서 돌아오면 나는
세상을 향해 이런 얼굴로 핀다
<빈 산이 젖고 있다/이성선>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신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
한 강물이 내려 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봄밤/이성선>
나귀의 귀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음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아직 젊어라
<어떤 아침에는/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 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어떤 풍경/최승자>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시집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시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시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쓸쓸해서 머나먼, 2010년, 문학과 지성사
<나 여기 있으면/최승자>
나 여기 있으면
어느 그림자가
거기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겠지
내가 여기서
책을 읽고 있으면
까부라져 잠들어야만 하는
어느 그림자가
나 대신 술을 마시고 있겠지
한 열흘 마시고 있겠지
-빈 배처럼 텅 비어, 2016년, 문학과 지성사
<나의 생존 증명서는/최승자>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빈 배처럼 텅 비어, 2016년 6월, 문학과 지성사
* 하릴없다
1.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2.조금도 틀림이 없다.
<들판에서 보리와 밀이/최승자>
지식과 지식이 싸울 때
自然(자연) 소외는 한없이 깊어지고
역사는 흙탕물이 되어 흘러간다
죽으면 땅의 지식은 필요가 없고
하늘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 잘난 지식들을 얼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들판에서 보리와 밀이 웃더라
저기 지식을 구걸하는
한 무리의 동냥치들이 지나간다
-빈 배처럼 텅 비어, 2016년,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