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144

토요일에도 일해요(유현아) 외

아직도 토요일에 일하는 곳이 있어요?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어요 계절을 앞서가며 미싱을 밟지만 생활은 계절을 앞서 가지 못했지요 어느 계절이나 계절 앞에 선 그 사람이 있었어요 수녀복 만들 때에도, 신사복 만들 때에도, 어린이복 만들 때에도 익숙한 손가락은 미싱 바늘을 타고 부드럽게 움직였어요 단 한 번도 자기 옷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여름엔 에어컨을 틀기 위해, 겨울엔 난방기를 틀기 위해 창문을 닫았어요 떠다니는 실밥과 먼지와 통증들은 온전히 열려 있는 창문 같은 입으로 들어갔어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그의 몸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가끔은 미싱 바늘이 검지를 뚫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일요일이 즐겁기 위해 토요일에 일해요,라고 대답했어요 끝에는 끝이 없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

문학일기 2024.08.21

새와 한그루 탱자나무가 있는집(문태준)외

오래된 탱자나무가 내 앞에 있네 탱자나무에는 수많은 가시가 솟아 있네 오늘은 작은 새가 탱자나무에 앉네 푸른 가시를 피해서 앉네 뾰족하게 돋친 가시 위로 하늘이 내려앉듯이 새는 내게 암송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주네 그 노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듯하네 새는 능인(능할能어질仁)이 아닌가 새와 가시가 솟은 탱자나무는 한덩어리가 아닌가 새는 아직도 노래를 끝내지 않고 옮겨 앉네 나는 새와 한 그루 탱자나무가 있는 집에 사네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

문학일기 2024.08.07

사랑의 전당(김승희) 외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던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천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

문학일기 2024.08.03

무현금(無絃琴)/박승민 외

그러고도 한참을 더 숨을 고른 뒤에야 바람의 환부(患部)를 조심스레 눌러봅니다. 닿는다는 건 자주 바뀌는 당신 마음의 일생을 따라 걷는 일인데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가 마음까지도 모르겠네. 이젠 도통 모르겠네. 투덕거리며 자꾸 당신 쪽으로 귀를 조금 더 기대어놓는 일인데, 이쪽으로 되넘어오는 찌그러진 마음의 대야를 펴서 다시 전해보는 일인데… 이번에는 어떤 화성악도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수백 번을 꼬아서 만든 명주실의 소리들도 끊어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참아 내던 들숨의 현(악기할絃)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허공을 끊고 터져나갈 때, 그 순간의 단심(丹心)만을 생각하며 다시 어두워지는 구름의 공명통 속으로 올려 보냅니다. 한생이란 답장이 오기엔 너무 짧은 거리, 어느 늙수구레한 어둠이 붉은 나뭇잎 ..

문학일기 2024.07.23

아침에 시 한 편(박용재, 나희덕, 김사이)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들어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

문학일기 2024.05.14

어머니와 아들

누운 듯 비스듬히 앉아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드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늙수그레한 아들 아들과 눈 맞추며 몸짓으로 말씀하시는 어머니 두 손 맞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장아장 걸음 옮기신다 뒷걸음치는 아들과 따르시는 어머니 튤립보다 고결하고 라일락 향기 보다 진한 두 사람 눈가에 이슬 고인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2024년, 토론토의 한 이탈리언 식당에서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문학일기 2024.05.08

아침에 시 한 편(이정록, 이설아, 신두호, 황영기)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

문학일기 2024.04.21

아침에 시 한 편(박신규, 리산, 박철)

수억년 전에 소멸한 별 하나 광속으로 빛나는 순간이 우리의 시간이라는, 은하계 음반을 미끄러져온 유성의 가쁜 숨소리가 우리의 음악이라는, 당신이 웃을 때만 꽃이 피고 싹이 돋고 당신이 우는 바람에 꽃이지고 낙과가 울고 때로 그 낙과의 힘이 중력을 지속시킨다는, 하여 우리의 호흡이 이 행성의 질서라는 그런 오만한 고백은 없다네 바람에 떠는 풀잎보다 그 풀잎 아래 애벌레의 곤한 잠보다 더 소소한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위해, 주름진 치마와 해진 속옷의 아름다움 쳐진 어깨의 애잔함을 만지기 위해, 수십년뒤 어느 십일월에도 순한 바람이 불고 첫눈이 내려서 잠시 창을 열어 눈발을 들이는데 어린 새 한마리 들어와 다시 날려 보내주었다고 그 여린 날갯짓으로 하루가 온통 환해졌다고 가만가만 들려주고 잠드는 그 하찮고..

문학일기 2024.04.21

아침에 시 한 편(이시영, 박성우, 안미옥)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아 빨래를 해 널었다 바쁠 일이 없어 찔레꽃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텃밭 상추를 뜯어 노모가 싸준 된장에 싸 먹었다 구절초밭 풀을 매다가 오동나무 아래 들어 쉬었다 종연이양반이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징그럽..

문학일기 2024.04.18

아침에 시 한 편(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어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

문학일기 2024.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