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이대흠)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4. 17. 07:33

<목련/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어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씼는다/이대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당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세월이 어떻게 동그란 무늬로 익어가는지 천천히 지켜보다가 달빛 내리는 언덕을 쳐다보며 꽃의 고통과 꽃의 숨결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가만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먼 데 있는 강물은 제 소리를 지우며 흘러가고 베릿내 골짜기에는 지친 별들이 내려와 제 뿌리를 씻을 것이다 그런 날엔 삶의 난간을 겨우 넘어온 당신에게 가장 높은 난간이 별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있는 새들은 하늘 한 칸 얻어 집을 짓는 것이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싶다

서러운 날들은 입김에 지워지는 성에꽃어럼 잠시 머무를 뿐 창을 지우지는 못한다 우리의 삶은 쉬 더러워지는 창이지만 먼지가 끼더라도 눈비를 맞더라도 창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으니 뜨거운 눈물로 서러움을 씻고 맨발로 맨몸으로 온 세상을 만드는 저 동백처럼 더 푸르게 울어버리자고 그리하면 어둠이 뿌리내린 별들이 더 빛나듯 울 일 많았던 우리의 눈동자가 더 반짝일 것이라고


<천관(하늘天갓冠)/이대흠>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데 갔다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옛날 우표/이대흠>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보낼 때
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
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
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
어떤 본드나 풀보다도 더 단단히
서로를 묶을 수 있었던 시절

혀가 풀이어서
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
순이 되고 싹이 되고
이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
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
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
그대 혀가 내게로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
이따금은 배부른 말떼가 언덕을 오르곤 하였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람이 혀로 들고
세상에서 가장 순한 귀들이 풀로 돋던 시절

그런 옛날이 내게도 있었지


<얼룩의 얼굴/이태흠>
장구를 치다가 가죽에 번져 있는 얼룩을 본 적이 있다 커다란 몸뚱이를 감쌌던 소가죽이 몸을 다 잃고 매 맞아가면서도 놓지않아 말라붙은 소 울음소리

그날의 소리는 죽지 않았고 떠나간 자들은 아주 떠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오래 그리다보면 문득 그의 얼굴이 얼룩 속에서 살아난다 때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얼굴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았을지라도 모르는 얼굴은 아니다 잊힌 한때에 내가 그리워했던 얼굴이거나 나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난데없이 방문한 것

바람이 비의 몸으로 와서 남긴 발자국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꽃의 숨결이 행기로 와서 쓰러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몇 개의 인과는 바람에 꽃잎이 떨아지는 것과 같은 범,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꽃의 혀를 건네면 너도 꽃의 말을 걸어온다 잎이기너 가시이거나 내가 준 것을 너는 갚으로 온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돌아온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터뜨릴 수 없고 말랑한 벽, 거기서 얼룩이 태어난다

눌러붙은 주검이 있었던 검은 바닥에서 고양이 한마리 불쑥 튀어나와 담 너머로 사라진다


<늙음에게/이대흠>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 봅니다

귀가 먼 것이 아니라
귀도 제 생각이 있어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
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
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

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
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

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
눈으로 듣습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
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

발은 또 천리 밖으로 다녀와
걸음이 무겁습니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이대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이마에서 북천의 맑은 물이 출렁거린다
그 무엇을 미워하는 법을 모르기에
당신은 사랑만 하고
아파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말은 향기로 시작되어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사라진다

누군가가 북천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
당신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거기 이미 출렁거리는 북천이 있다며
먼 하늘을 보듯 당신은
물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는 순간 그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 풍덩 빠진다

북천은 걸어서 가거나
헤엄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 눈동자를 거치면
바로 갈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걷거나 헤엄을 치다가
되돌아나온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사랑을 할 줄만 알아서
무엇이든 다 주고
자신마저 남기지 않는다


<북천의 봄/이대흠>
미안하지만 북천엔
봄이 오지 않는다

너의 맑은 눈동자 같은 씨앗은
영원히 묻힌다

유일한 희망은 적멸이라
나무들은 이 나이테를 가지지 못한다
자라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말의 나무들

무서운 소문을 몰고 다녔단 바람은
얼음 골짜기에서 얼고

울음 속으로 들어간 자들은
얼어서 말이 없고

다른 별의 고요를 다 데려와도
북천에서는 시끄러울 뿐이다

북천에서는 그대가
그대로 있는 것만이 사랑이다


<북천에서 쓴 편지/이대흠>
북천에서 쓴 편지는 햇살에 녹아요
밤이 오면 다시 얼고 낮이면 녹지요

북천에서 쓴 편지는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어요
북천에선 백년쯤이 순식간에 지나가죠
사양의 말 두어자 적는 동안에 몇 생이 후딱 스켜가 버리죠

북천에는 문자가 없어요
어떻게 마음을 옮겨 적을 수 있을까요?

북천에서 쓴 편지는
마음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래요
사랑의 말로 쓴 편지로 쓴다는 건
얼고 녹고 부서지고 타버려도
사라지지 않을 알갱이 하나 전하는 것이지요

사랑의 말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싹이 돋았다가 지지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이 죽어도 변하지 않을 살아있는
말의 숲이 되는 거지요

말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풀이되고 나무가 되고 나비가 되어
스미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지게질/이대흠>
쟁기질 써레질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아버지가 지게질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고 하였다

결혼을 하고 맞은 첫 겨울 혼자 가끔 긁어 솔가리 나무를 했던 어머니는
남 보기 슳어서 아버지에게 함께 나르자고 했단다

아버지 지게에 석단을 징끼고 어머니는 머리에 넉단을 이었다

캄캄해진 산길을 내려오는데 앞선 어머니 귀에 탁탁탁 지겟발을 돌부리들이 시비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와 나뭇간에 짐 부릴 때 보니 아버지 지게에서는 새끼줄만 달랑 떨어졌다


<눈물별/이대흠>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흘려 모아 말린 별씨를 들고 어느날 훌쩍 하늘밭으로 가버리셨다

서쪽 하늘에 움 돋는 눈물별

구석에 버려진 조각 비누 같던 한생이
문득 아주 버려진 날


<그 말에 들었다/이대흠>
집이 참 좋다고들 하였다

골짜기에 머무르며
바람이 놀 마당도 닦았다고

하늘을 들여 하늘과 놀고
계곡물소리 오시면
별자리 국자로
달빛을 나눠 먹는다고 하였다
환하다고

문 열면 엎질러진 하늘이 출렁
가슴속까지 흘러들더라고 하였다
처마에 새소리 걸리고
꽃향기는 경전처럼 고인다더라

물소리를 귓바퀴로 감았다 풀며
하루를 흘러가노라고

하늘다 차지하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
꽃향기마저 독접했더라며
숲 그늘에 털썩 부려놓는 바람에
마음 두렁에 바람 들었다

차마 집을 집지 못하고
집을 삼았더라고
이름도 짓지 않아
어디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풀의 집 여치의 집
하늘의 집 물소리의 집에
마음 구들장 널찍하게 깔아두었으니

다녀가시라 했다는 말에
벌써 들었다 하였다

*시인은 먼지 하나에도 한 우주가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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