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박신규, 리산, 박철)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4. 21. 11:18

<청혼/박신규>
수억년 전에 소멸한 별 하나
광속으로 빛나는 순간이 우리의 시간이라는,
은하계 음반을 미끄러져온 유성의 가쁜 숨소리가
우리의 음악이라는,
당신이 웃을 때만 꽃이 피고 싹이 돋고
당신이 우는 바람에 꽃이지고 낙과가 울고
때로 그 낙과의 힘이 중력을 지속시킨다는,
하여 우리의 호흡이 이 행성의 질서라는
그런 오만한 고백은 없다네

바람에 떠는 풀잎보다
그 풀잎 아래 애벌레의 곤한 잠보다
더 소소한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위해,
주름진 치마와 해진 속옷의 아름다움
쳐진 어깨의 애잔함을 만지기 위해,
수십년뒤 어느 십일월에도
순한 바람이 불고 첫눈이 내려서
잠시 창을 열어 눈발을 들이는데
어린 새 한마리 들어와 다시 날려 보내주었다고
그 여린 날갯짓으로 하루가 온통 환해졌다고
가만가만 들려주고 잠드는
그 하찮고 미미한 날들을 위해서라도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 2017


<울창하고 아름다운/리산>
모퉁이를 돌면 말해다오 은밀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고

가령 저 먼 곳에서 하얗게 감자꽃 피우는 바람이 왔을 때 바람에 데려온 구름의 생애가 너무 무거워 빗방울 흐드득후드득 이마에 떨어질 때 비밀처럼 간직하고 고픈 생이 있다고

처마 끝에 서면 겨울이 몰고 온 북국의 생애가 풍경처럼 흔들리고 푸르게 번지는 풍경 소리 찬 바람과 통증의 절기를 지나면 따뜻한 국물 펄펄 끓어오르는 저녁이 있어 저녁의 이마를 짚으며 가늠해보는 무정한 생의 비밀들

석탄 몇조각 당근 하나 노란 스카프 밀짚모자 아직 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은밀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 다 알려지지 않은 무엇이 여기 있다고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창비, 2017


<빨랫줄/박철>
건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 남아 있다
하늘도 잠시 쉬는 시간,
예서 제로 마음의 빨랫줄 늘이니
누구든 날아와 쉬었다 가라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창비시선 420


<약속/박철>
첫눈 오면 대한문에서 만나자는 약속으로
눈 오는 날 덕수궁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다
여긴 눈이 오는데 거긴 오지 않는 탓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은 내리고
사람들은 고무줄처럼 제 집으로 간다
그래도 무언가 남아 서성이는 것들이 있고
또 언젠가 저 곱상한 어둠처럼 어김없이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죽은 뒤라도 어디에서 만나자고 당신과 쪽지를 나누고 싶다
아, 그러면 어디가 좋을까
나는 지금은 사라진, 김포 개화산 너머 보물웅덩이
그 깊은 낚시터에서 만나자고 전하고 싶다
퇴각하는 몽골군이 보물을 잔뜩 버리고 갔다는
그 소연한 웅덩이에 앉아
이승에서 못다 건져올린 금은보화를 끄집어내며
말없이 당신과 나란히 앉아 창포잎이나 되고 싶다
지금처럼 어둠이 내려
내남없이 세상 온통 한통속이라 하여도
내가 기다리던 이가 맞는지조차 분별이 필요없는
잠시 그런 행복에 젖어
다시 헤어질 날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이게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는 당최 관심도 없어


<일출/박철>
새벽에 일어나 원고를 보는데
아내의 얼굴이 어둡다

이 시집 상 받으면 장모 줌세
아내의 얼굴이 환해지며
뷬으로 간다


<첫눈/박철>
등 굽은 한 늙수그레가
지퍼를 닫듯
쓸며 가는 외진 길

한때 그가 문을 열고
쏟아낸 말들 지우며

자귀숲은 등 뒤에서 그 구부정을 바라보다
더 말없이
첫눈처럼 보내주네

무명이란 가장 마즈막에 펴오르는 불꽃, 놀이
멀리 기러기 셋
하늘 열며 날아간다


<꽃/박철>
그 향기 아직 뜨거운
저 꽃의 마음을 안다
순대며 명자빛 떡볶이 성김을 뒤로 하고
구석에 등 돌려 오뎅 꼬치를 삼키는 목멘 외로움, 아

그 소태로움 혹여 세상이 알아챌까
유리창 밖으로 얼굴 들지 못하고
없는 고향 흰눈이나 뿌리며
행여 누군가 알아볼까 숨죽여 뜨건 국물 넘기는
병든 노구에 기울지 않은 향기,

그게 꽃이 아니고 무에냐


<화학반응/박철>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용각산/박철>
기침보다 용각산 먹기가 힘들다던 해병 2기의 5촌 당속이 힘차게 세상을 뜨시던 날 둬달 전까지만 해도 국산 코란도를 몰고 휙 들어서며 안 돼, 안 돼 이장은 안 된다던 그 양반의 무거운 속을 알게 되던 날 해가 맑고 날은 가벼웠다 입에 털어넣기도 전에 턱밑에 날려 영 면이 안 선다는 용각산 같은 생이 한번은 이 지구의 기침을 멈추게도 했을까 암, 했을 꺼야 그렇지 그랬을 꺼야 허우대 좋고 심성 좋고 한번 인간은 영원한 인간일지도모를 해병2기의 당숙은 이 맑은 날 참 화하게도 날리며, 가셨다 가버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