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이정록, 이설아, 신두호, 황영기)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4. 21. 11:26

<까치설날/이정록>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루 더 있다 갈게요. 거짓부렁하게 해주십시오. 뭔 일 있냐? 고향에 그만 오려고 그러냐? 한숨 내쉴 때, 파리채며 쥐덫을 또 수세미로 닦을까봐 그래요. 너스레 떨게 해주십시오, 용돈 드린 거 다 파목고 가야지요. 수도꼭지처럼 콧소리도 내고, 새끼 강아지처럼 칭얼대게 해주십시오. 곧 이사해서 모실게요. 낮짝 두꺼운 거짓 약속을 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나무만이 아님을 그르쳐주었듯, 내 나무그늘을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대대로 건네받으셨다는 금반지는 다음 추석에, 그다음, 그다음, 몇십년 뒤 설날에 받겠습니다. 당신의 고집 센 나무로 살겠습니다. 나뭇잎 한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시오.


<날짜변경선/이설야>
바뀐 주소로 누군가 자꾸만 편지를 보낸다

이 나라에서는 벌써 가을이 돌아서버렸다
매일 날짜 하나씩 까먹고도 지구가 돌아간다
돌고 돌아서 내가 나에게 다시 도착한다

지금 광장에서 춤추는 소녀는 어제 왔지만
나는 내일 소녀를 만날 것이다
만년 전 달려오던 별빛이 내 머리 위를 통과해갔다
그래서 오늘은 너와 헤어졌다

검은 재를 뒤집어쓰고
우리는 매일 무릎이 까진다

나에게 도착한 미래가
어제 아프다고 전화를 했다

그래,
이제 이 나라에서 입력한 날짜들을 모두 변경하기로 하자

휙휙, 나무들이 날아가고
섬들이 날아가고, 낙엽이 빗방울처럼 날아가고
날아가고, 날아가는 것들
뒤바뀐 날짜를 버리기로 하자
버리고 버려서
가슴속엔 새로운 정부를
모든 경계선을 지워가며


<지구촌/신두호>
햇빛 속을 걸었어
정오를 지나
지구인의 심정으로
이곳의 대기는 나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다
호흡기 계통에 무리를 느끼며

햇빛이란 뭘까
일자를 떠올려도 빛나는 건 없었어
존재란 잘 구워진 빵과 같아서
신체가 주어지면
영혼은 곧 부드럽게 스며들 텐데
버터가 녹아들듯이

열기가 필요할 거야
태양이 일종의 장소라고 믿는다면
뿜어져나오는 광선을 햇빛이라고 부른다면
신체와 영혼을 구원하는 오븐이라는
불길한

일기예보는 어제를 잊어가며 계속되겠지
지구 곳곳에선 동식물들이 자라나고
마지막으로 감기는
동시대적인 눈들

처음으로 종이 울리겠지만
솟아오르는 로켓을 보면 언제나 우울해져
모든 것을 남겨두고
지구에서 벗어나려

빛을 떠안고 있을 때
영을 센 이후에 시작된 것들은
여전히 영을 믿고 있겠지
접었던 손가락들을 펼치며

대기권으로 운석이 낙하하고 있다
불타오르는 잔해들에 눈을 떼면서


<길을 짜다/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촉촉한 파스타에 울던 사람, 발을 만져봐 배가 고플 거야
바늘로 빵을 찌르는 제빵사의 손길
먹줄 실 뽑아 바닥을 튕기는 거미의 솜씨
어긋난 선을 바늘이 엮어주면
옷이 한눈에 주인을 찾아, 보란 듯이 걸쳐 줄래, 그거면 충분할 거야
버스는 늘 먼저 떠나
박물관 뒷길은 혼자된 연인만 걸어가지
거기 길이 끝난 곳에 당도하면
길과 길을 잇는 재봉틀이 떠오를 거야
한 벌의 옷을 짓고 거기에다 누군가 몸을 넣는다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머리끝에 꽃이 달리잖아
*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소감>
사람이 중요했다. 머리에서 나오는 날것들을 적었다. 시라기보다는 시래기를 엮듯 줄에 묶어 매달아 놓았다. 계속 매달려 있어야 했다. 먹지 못하는 벽을 채웠다. 바람벽 뚫린 구멍으로 엿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 일주일에 한 편의 시를 적었다. 이 한 편을 위해 시집을 한 권씩 밥 먹듯이 읽었다. 비 오는 날 멸치를 종이 위에 놓고 몇 시간을 보았고 영양 자작나무 숲을 찾아가다 돌배나무에 기대 쓰러지는 집도 보았다.
딱 이렇게만 살고 싶다. 일어나 상큼한 과일 먹듯 세 편을 읽고, 아침 먹고 소화제로 한 편, 점심 때 커피 마시듯 세 편, 졸릴 때 얼음 뜬 감주 같은 한 편, 저녁에 퇴근하며 지나가듯 한 편, 설거지 마치고 정리하듯 두 편, 잠들기 전 돌아보고 한 편! 그리고 꿈속에서 딱 한 편의 시를 쓰고 싶다.
아직은 미흡하고 거칠고 아둔한 상태로 출발점에 서 있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 숨을 가다듬는 중이다. 시를 쓰는 길로 이끌어주신 안도현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시는 가족이라는 걸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