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5

부추꽃

뒤뜰 텃밭에 부추꽃이 한창이다. 부추밭 사이즈가 아내와 나 두 식구가 먹기에는 너무 크다. 내년에는 반 이상 줄이려 한다. 줄이더라도 이웃과 나누어 먹기에 충분하고 남으리라. 꽃을 잘라내고 내년 농사 준비를 해야겠는데 벌이 친구를 데리고 와 꽃 사이를 넘나든다. 부추꽃을 베어버리면 벌들이 서운해할까 봐 망설여진다. 씨가 떨어져 밭에 뿌려지면 내년 농사는 엉망이 될 터인데...

미셀러니 2024.08.23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신동호)

지쳤거나 심심하거나, 새로운 기분이 필요하거나, 그저 발길 닿는 대로였거나, 강북 어디를 돌고 돌아 집이었는지 길이었는지, 오늘이었는지 먼 훗날이었는지, 공간이었는지 시간이었는지 간에. 창문여고를 지나 장위동 방향으로 오른쪽 길을 올라가는 172번 버스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탄다. 사십 년 전 어디메, 기름 자국이 밴 봉지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는데, 춘천에 생긴 원주통닭집 길모퉁이 어디에서 돈을 세어보고 계실 거 같은 장위동. 하계동 장미 아파트에서 내려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타는 그 자리가 큰딸이 태어나던 시절 살던 하계시영아파트 6동 앞이다. 성북역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 기사께 차비 오십 원이 부족해 절절매던 날들이 마치 지금 같아서 등골에 진땀이 밴다. 거기서 만성 원형탈모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동전..

문학일기 2024.08.22

토요일에도 일해요(유현아) 외

아직도 토요일에 일하는 곳이 있어요?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어요 계절을 앞서가며 미싱을 밟지만 생활은 계절을 앞서 가지 못했지요 어느 계절이나 계절 앞에 선 그 사람이 있었어요 수녀복 만들 때에도, 신사복 만들 때에도, 어린이복 만들 때에도 익숙한 손가락은 미싱 바늘을 타고 부드럽게 움직였어요 단 한 번도 자기 옷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여름엔 에어컨을 틀기 위해, 겨울엔 난방기를 틀기 위해 창문을 닫았어요 떠다니는 실밥과 먼지와 통증들은 온전히 열려 있는 창문 같은 입으로 들어갔어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그의 몸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가끔은 미싱 바늘이 검지를 뚫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일요일이 즐겁기 위해 토요일에 일해요,라고 대답했어요 끝에는 끝이 없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

문학일기 2024.08.21

새와 한그루 탱자나무가 있는집(문태준)외

오래된 탱자나무가 내 앞에 있네 탱자나무에는 수많은 가시가 솟아 있네 오늘은 작은 새가 탱자나무에 앉네 푸른 가시를 피해서 앉네 뾰족하게 돋친 가시 위로 하늘이 내려앉듯이 새는 내게 암송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주네 그 노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듯하네 새는 능인(능할能어질仁)이 아닌가 새와 가시가 솟은 탱자나무는 한덩어리가 아닌가 새는 아직도 노래를 끝내지 않고 옮겨 앉네 나는 새와 한 그루 탱자나무가 있는 집에 사네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

문학일기 2024.08.07

사랑의 전당(김승희) 외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던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천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

문학일기 2024.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