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감격이 있는 나날 88

시온에게 (2022월 4월)

아빠엄마와 함께 손주 시온이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다.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 더욱 반갑고 기뻤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이에게 이렇듯 소중한, 감격의 순간을 선물로 주셨다. 훗날 시온이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 편지 형태로 몇 줄 적어 둔다. 사랑하는 시온아 네가 처음 교회에 나온 날 할아버지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유모차를 밀고 교회로 들어오는 네 아빠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당시 나는 시무장로였는데 예배부를 담당하고 있어서 교회로 들어오시는 교인들을 맞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않던 일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네 아빠와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연히 네가 유모차에 타고 있었지...

봉황터

작은 자랑거리가 있어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건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다물고 주머니는 열라고 하는데 주머니는 닫히고 입만 열리니 큰일이다.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려 해야 하는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불쑥 내뱉고 후회하기 일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야만 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입이 근질근질하여 쓸데없는 말을 떠벌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입이 무거워 해야 할 말만 하고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목이 뻣뻣하여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다. 어떻게 하면 더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세워주고 주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 년도 더 된 어느 날의 이야기이다. 어머님을 모시고 사촌 형님과 함께 식구들이 모였다. 캐나다에서 모처럼 아들 내외가 왔다고 모인 저녁 식사 자리였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사촌 형이 아내에게 물었다. “동생 택희가 장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동생이 장로가 된 후 뭐 달라지거나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모두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로서는 그 적막이 길게만 느껴졌다. 머뭇거리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네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휴~~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아내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창피할 노릇이었겠는가. 어머님께는 물론이고 동생들과 조카들에게까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당신은 더 나은 사..

2022년 만우절에

사위(Dr. Thi Ho Shin)가 일하는 병원의 간호사들이 만우절에 아래와 같은 사진(이미지 합성)과 동영상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사진 속에 있는 손주 제영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제영아, 네 안에 어떤 잠재력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삶만이 가능할 뿐이지. 새로운 길이 두려운 것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삶은 멀리서 감상만 하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도전이란다." "네 친할아버지 신재억 교수님과 나, 네 아빠 엄마는 새로운 풍경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도전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단다."

세계는 하나 이기도 하고 낯선 곳이기도 합니다

포트 이리 팀호튼에 앉아 오렌지 페코 티를 마십니다. 홀 가득 울려 퍼지는 음악은 BTS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포트 이리는 뉴욕주 버펄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용한 시골입니다. 은퇴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동네이지요. 토론토와는 다르게 주민 다수가 백인이며 나이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도, 카운터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서로 친숙한 사이인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동양인이 드문 동네라 그런지 바라보는 눈길이 때로는 낯섭니다. BTS의 다이너마이트를 당연한 듯 듣고 있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의 모습도 낯설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키에브 외곽 마을 부차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접합니다. 부차에 주..

친구야 수고 많았다

재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인디애나로 왔고 3개월 가량 머무를 예정이라고 한다. 재호는 수많은 추억을 공유하는 깨복쟁이 친구로 지난달 가톨릭 의대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젊은 시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생 몸담은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것이다. 65세를 전후로 친구들이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한다. 재호도 그중 한 명이다. 우리 모두 잘살았다고, 잘 해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팬데믹이 유행하기 직전인 2019년 11월 친구 내외는 학회에 참석할 겸 북미 동부를 방문하던 중 잠시 토론토 집에 들렀고 나이아가라를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堂姪 기헌

기헌은 나의 멘토 중 한 사람이자 존경하는 사촌 이경희 형님의 큰아들이다. 형님은 큰집 큰아들이고 나는 작은 집 큰아들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세 아들을 두셨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상을 뜨셨다.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경희 형님은 큰아들에게서 난 큰손주이고 나는 셋째 아들에게서 태어난 큰손주이다. 엄격하기 그지없던 유교 집안의 며느리였던 할머니가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제사를 없애버리셨다. 서동댁이라는 택호로 불리셨던 이남숙 할머니는 어려운 중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녹록지 않은 살림을 꾸리셨다. 대가 세고 강인한 성격의 할머니는 하루 세 시간씩 거적을 뒤집어쓰고 뒤란에서 기도하셨다. 할머니는 경희 형님과 내가 신학..

시온이와 함께 웃은 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고개를 들면 길게 뻗은 가지가 보였다. 오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고목이 지붕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로 뻗은 가지가 이층집 높이의 두세 배는 되어 보였다. 이웃집 지붕에까지 팔을 뻗치고 있었다. 오후 내내 눈이 내렸고 활짝 핀 눈꽃을 바라보았다. 태어난 지 육 개월을 넘긴 시온은 할아버지를 웃고 또 웃게 했다. 3/11/2022

봄을 기다리며

꽃피는 춘삼월이라 했던가. 새해를 맞은 지 두 달이 훌쩍 지나갔고 삼월로 접어들었다. 머지않아 숲속 나무는 뿌리로부터 물을 길어 올리기 시작하리라. 봄기운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걸까. 이른 봄이면 태자 누나는 쑥을 따러 다녔다. 누나는 어머님 쪽 먼 친척뻘이었는데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이며 집안일을 하며 함께 살았다.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이른 봄이면 누나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쑥을 따러 나섰다. 따온 쑥을 모았다가 쑥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초록빛이 나는 쑥떡은 쫄깃쫄깃했고 쑥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지난해 봄 아내가 알려주는 숲으로 가서 산마늘(명이나물)을 땄다. 아내는 한 움큼 따온 산마늘에다 갤러리아에서 사 온 산마늘을 합하여 김치를 담갔다. 산마늘의 진한 향은 봄의 희열 ..

여우 만난 아침

황금빛 털을 가진 여우 한 마리가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여유 있는 걸음걸이였다. 금방 목욕이라도 한 듯 말갛고 잘생긴 녀석이었다. 눈 더미 사이로 난 길을 유유히 걸으며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현관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주말에만 함께 지내는 아내가 뒤뜰에 토끼가 있으니 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토끼는 지금 깊은 *겨울잠에 빠져있을 거라며, 청설모(squirrel)를 잘못 본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못 이긴 듯 내려다보니 토끼 한 마리가 눈 위를 오락가락하며 빠져나갈 공간을 찾고 있었다. 영하 십 도가 넘는 강추위가 수일 째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서성이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 땅이 꽁꽁 얼어붙은 데다 눈까지 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