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겨우내 쌓인 눈이 언제나 녹을까 싶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집 안밖에 쌓였던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개나리의 소곤거림이 울타리 너머로 들려오는 듯하다. 수선화며 튤립이 얼굴을 드러낼 날도 머지않았다.
쓰레기차가 오는 날이다. 일곱 시 전에는 집을 나서자고 했던 터라 마음이 급하다. 과년한 딸에게 국을 데워달라고 했다. 쓰레기 정리가 끝나면 몇 술 뜨고 나가려는 심사였다.
아빠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 직접 하면 되지 왜 내게 부탁을 하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아무리 캐나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었기로서니 아비를 위해 국을 데우는 일도 못 한단 말인가.
쓰레기 정리를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와 식탁에 앉았다. 미지근히 데워진 국이 밥에 말아져 덩그마니 놓여있다.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다. 국을 데워달라고 한 것이 그리도 귀찮았나.
어머님은 국이란 따뜻하게 먹어야 한다며 조금이라도 식을라치면 몇 번이고 다시 데우셨다.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아 국그릇을 빼앗으려 해도 그러는 게 아니라며 고집을 부리셨다. 이런 일로 어머님의 고집을 꺾기란 불가능했다. 자식을 향한 당신만의 사랑표현법임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국을 데워 달라고 부탁했을 때 왜 아빠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는지 되물었다. 흰색 목장갑을 끼고 있기에 혹 무엇을 고치기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작업을 시작하면 늦어질 것 같아 확인하고 싶었단다.
나는 딸의 물음을 아빠가 직접 하면 되지 왜 그런 일까지 시키려하느냐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딸아이가 국을 따끈하게 데워주지 않아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정성이 부족하다 싶었다. 밥과 국을 따로 놓고 먹어야 정상인데 성의 없이 밥을 말아 상에 올려놓았으니 그 또한 실망스러웠다. 자식에게 한국인의 정성과 예절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아이는 오히려 자신이 서운했다고 한다. 국이 너무 뜨거우면 식혀 먹기도 힘들 뿐더러 입천장이나 혀를 데일 수 있어 일부러 미지근하게 했단다. 나름 정성껏 데워 식탁에 놓았는데 자신이 데운 국밥은 저만치 밀쳐놓으니 거절당하는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부녀지간의 소통이 이러할진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오죽할까.
직장생활을 할 때 그룹사에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대한 강의를 담당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니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니 하는 이론적인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지 않았나 싶다.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고 자부해온 믿음이 상대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마음에 맞을 때만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맞지 않을 땐 지체 없이 귀를 닫아버리곤 하지 않았을까.
그나마 아이와 대화를 나눈 건 잘한 일이었다. 서로의 생각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오해가 지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빠가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고 서운해 했을 터이요 아비는 아비대로 자식이 아비의 부탁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여겼으리라.
딸아이는 할머니가 아빠를 많이 사랑했었나보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얼어붙은 마음이 눈 녹듯 녹는다. 터놓고 나누는 진솔한 대화는 마음속 응어리를 녹여주는 봄바람인가보다.
'수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다페스트에서 온 여인 (0) | 2011.07.30 |
---|---|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나 해 (0) | 2011.07.30 |
힘내라 일본 (0) | 2011.07.30 |
별리의 변 (0) | 2011.07.30 |
무면허 운전자 (0) | 2011.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