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다운 타운에 나왔습니다. 프린세스 마가렛 병원에서 MRI촬영이 아침 7시에 있었습니다. 지난해 오월 뇌종양(악성이 아니고 양성이었음) 제거 수술을 한 후 두 번째 찍는 것입니다. 일 년에 한번씩 MRI 촬영을 하여 경과를 보자는 게 담당의사의 이야기였습니다.
프린세스 마가렛 하스피털은 암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간호학 전공한 둘째 딸아이가 4학년 2학기에 실습을 했던 병원이기도 합니다. 딸아이는 6월 6일에 있을 국가고시(Registered Nerse)를 준비 중인데 6월 8일에 졸업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다운 타운에 나온 김에 피검사도 했습니다. 병원이 아닌 아웃사이드 랩(Toronto Medical Laboratories)에서 해야 한다기에 유니버스티와 던다스 근처의 한 랩(123 Edward St., Suite 808)에서 피를 뽑았습니다. MRI와 Blood test의 결과는 토론토 웨스턴의 닥터 젠틸리에게 전달될 예정입니다.
모든 검사를 마친 후 유니버시티와 던다스 코너에 있는 팀 호튼에 앉아 크림치즈 베이글을 곁들여 커피를 마십니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커피도 마시고 사람들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일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해 5월 아버님은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고, 저의 수술은 5월 26일에 있었습니다. 아들의 수술과 회복에 지장이 있을까 봐 7월말이 되도록 알리지도 않으셨지요. 암으로 고통 받으며 생명을 연장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게 부모님 사랑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미 아버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제 건강을 염려해주시던 김인숙집사님도 세상을 떠나셨지요. 삶이 끝없이 지속될 것으로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버이날인 오늘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과 홀로 계신 어머님을 생각에 다시 한번 먹먹한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유니버스티 에비뉴에는 마운트 사이나이, 토론토 제너럴, 프린세스 마가렛, 식키즈(SickKids Hospital)등 병원들이 즐비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최고의 병원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높은 듯합니다. 다운타운에 나오니 사람들의 발걸음에 힘이 넘칩니다. 서울 사람들에 비하면 느릿하지만 캐나다에서 이 정도라면 분명 잰 걸음입니다.
팀호튼 커피점도 다른 어떤 곳보다 넓고 깨끗합니다. 다운타운의 라이프 스타일이 변두리 지역과 사뭇 다릅니다. 5월 8일 아침 다운타운의 커피점에서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낍니다. 다름을 즐깁니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정호승 시인의 산문을 읽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 올려 놓습니다.
새는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정호승
거리에 마른 나뭇가지가 많이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띈다. 꽃샘바람이 유난히 기승을 부린 탓인지 올봄엔 나뭇가지가 더 많이 떨어져 거리에 나뒹군다. 대부분 작고 가는 것들로 길고 굵은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는 경우는 퍽 드물다. 예년엔 그렇지 않았는데 올봄엔 그런 나뭇가지를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우연히 TV 화면에서 까치부부가 집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장면을 보게 된 탓이다. 까치부부는 도심의 가로수 윗동에다 집을 짓기 위해 끊임없이 나뭇가지를 부리로 물어다 날랐다. 지난겨울에 사람들이 나무의 윗동을 마치 새총처럼 잘라버려 까치부부가 물어온 나뭇가지는 얼키설키 엮이지 못하고 계속 땅바닥에 떨어졌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가지 하나 남아 있지 않아 집의 기초공사를 할 수 없는데도 거의 한 달 동안이나 거리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물어다 날랐다. 까치들은 집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어 사람들이 집을 없애버려도 원래 있었던 그곳에다 다시 지으려고 노력한다는 거였다. 그 노력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참으로 미안하고 아팠다.
그때 문득 봄이 오면 왜 꽃샘바람이 꼭 불어오는지, 나뭇가지가 왜 바람에 잔잔하게 부러져 거리에 나뒹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까치와 같은 작은 새들로 하여금 집을 지을 때 그런 나뭇가지로 지으라고 그런 거였다. 만일 꽃샘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또 떨어진 나뭇가지가 마냥 크고 굵기만 하다면 새들이 그 연약한 부리로 어떻게 나뭇가지를 옮길 수 있겠는가.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태풍이 불어와도 나뭇가지가 꺾였으면 꺾였지 새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지으려면 새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바람이 고요히 그치기를 기다려 집을 지으면 집짓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나뭇가지를 물어오는 일도, 부리로 흙을 이기는 일도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지은 집은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겠지만, 바람이 불지 않은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만약 그런 집에 새들이 알을 낳는다면 알이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새끼가 태어난다면 새끼 또한 떨어져 다치거나 죽고 말 것이다.
새들이 나무에 집을 짓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높은 나뭇가지 위에 지은 까치집을 보면, 그것도 층층이 ‘다세대 주택’을 지어놓은 것을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나무 또한 아름답다. 새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나무에 지을 수 있어서 좋고, 나무는 새들의 집들 때문에 자신들이 아름다워져서 좋다. 이 얼마나 사랑과 배려가 있는 조화로운 이타적 삶인가.
인간들은 그런 까치집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다. 언젠가 화가 이종상 선생께서 까치집이 있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풍경을 그린 ‘이사’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나무는 뿌리 부분을 트럭 위쪽으로 걸쳐놓고 길게 누워 있었는데, 아래쪽 나뭇가지엔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트럭은 숨차게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를 까치 두 마리가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트럭에 실려 가는 까치집을 따라가는 까치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까치는 이사를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 집을 지어놓은 나무가 인간에 의해 이사를 가기 때문에 가는 거였다.
새들이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 것은 인간이 집을 지을 때 땅을 깊게 파는 것과 같다. 건물의 높이에 따라 땅파기의 깊이는 달라진다. 땅 파기가 힘들다고 해서 얕게 파면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현재의 조건이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미래의 조건이 좋아질 리 없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집을 짓는다. 이 시대도 민주와 자유의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 집을 언제 어떻게 지어야 하느냐 하는 게 늘 문제다. 그 집은 어느 한때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집이 인생 전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시대의 집도 시대 전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인생의 집도 시대의 집도 새의 집처럼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새들이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듯이 우리도 고통이 가장 혹독할 때 집을 지어야 한다. 오늘의 악조건이 내일의 호조건을 만든다.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군다.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로 하늘 높이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만일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올봄엔 나도 한 그루 나무처럼 나뭇가지가 잔잔히 많이 부러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