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이택희
새집으로 이사했다. 뒤뜰에 잔디가 깔려 있어 좋았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잔디만 보아도 마음이 평안해졌다. 잔디를 보면서 고향의 강 언덕을 생각하곤 했다. 푸른 강 언덕 너머 파란 하늘로 두둥실 떠가던 흰 구름이며 출렁이며 흐르던 강물을 떠올리곤 하였다. 살랑거리는 가지 사이로 비릿한 강 내음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을 게다. 아버지는 고향 땅에 이 층 양옥집을 지었다. 아담한 정원도 만드셨다. 사철 푸른 나무며 빨간 장미, 난초를 심으셨다. 정원 한쪽 옆으로는 잔디를 깔아 한껏 모양을 내었다. 유명을 달리하시기 전까지 당신이 지은 집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셨다. 이런 추억 때문인지 이사 온 집의 초록빛 잔디는 과분한 선물이었다.
목이 마를까 봐 수시로 물을 주고 어느 정도 자라면 보기 좋게 깎아 주었다. 일 년쯤 지났을까. 이런저런 일들로 잔디를 돌보지 못했다. 새로 시작한 일로 바빴고 한동안 건강이 나빠져 돌볼 겨를도, 에너지도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잔디밭은 처음 모습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자라기 시작하더니 민들레, 질경이밭으로 변해갔다. 가끔 뽑아내긴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클로버까지 가세했다. 파랗던 잔디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잡초에 자신의 공간을 몽땅 내어주고 말았다.
뒤뜰이 어쩌면 마음 밭 같다는 생각도 했다. 작은 자랑거리도 참지 못하고 이곳저곳 말하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상처를 입고 토라지는 내 모습이 잔디밭과 닮아있었다. 정화하지 않으면 쉽게 자리를 차지하는 욕정과 이기심, 시기하는 마음은 영락없는 잡초였다.
온통 잡초밭으로 변하자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보기에도 싫었을뿐더러 도대체 어떻게 관리를 하였기에 저 지경으로 만들었나 흉볼 것 같기도 했다. 큰집으로 이사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청소하기도 힘든데 뒤뜰에 난 잡초를 뽑다가 볼일 다 보겠다 싶었다.
하루는 잔디를 걷어내고 텃밭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잡초와 싸우는 시간에 차라리 채소라도 심어 가꾸면 낫지 않을까 여겼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며 부모님께서 채소 가꾸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키만큼 크던 들깨밭은 숨바꼭질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고 길게 자라던 대파도 인상적이었다. 한여름이면 마당 가운데 놓인 평상에 앉아 밭에서 기른 상치와 쑥갓으로 쌈을 싸 먹곤 했다. 차가운 물에 몇 차례 식힌 밥을 한술 떠 입에 넣고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으면 시원한 맛이 그만이었다.
걷어내면 그럭저럭 쓸만한 텃밭이 나올 듯하였다. 늦은 가을 잔디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뿌리를 깊이 내려 뽑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떼어낸 잔디를 버릴 적당한 장소도 찾아야 했다. 일부는 앞쪽 담장 밑에 붙여 물의 흐름을 조정하는 데 썼고 일부는 햇빛에 말려 내다 버렸다.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씨앗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른 봄 각목 몇 개를 사 칸막이를 만들고 흙도 사다 부었다. 적당한 크기의 텃밭이 만들어졌다.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상치와 쑥갓, 부추와 들깨 씨앗을 흩뿌렸다. 신기하게도 씨앗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났다. 토마토와 오이도 심었다. 싹이 트고 잎이 자라더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요즈음은 시간만 나면 뒤뜰로 나가게 된다. 토마토가 익어가는 모습이며 오이가 크기를 더해가는 모양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텃밭에서 자라는 녀석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체험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 잡초를 뽑으며 부모님 모습도 본다. 때로는 작은 텃밭이 이웃을 불러 모은다. 행복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오감(五感)으로 느낀다.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싶다.
뒤뜰은 어쩌면 변해가는 내 모습과도 닮아있다. 때로는 푸르다가 때로는 잡초로 가득하니 말이다. 가능하면 나 또한 밭이 되고 싶다. 한때는 골칫거리였을지 모르지만, 결국엔 변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저 텃밭처럼 풍성한 밭이 되고 싶다. 이웃과 자녀들이 세상 사는 일로 힘들고 지칠 때 수시로 찾아와 쉼을 얻고 가는 넉넉한 공간이고 싶다.
* 덧붙임: 아호 한소(閑素)를 추천해주신 우목 김영근 님께 이 글을 헌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