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기형도>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떄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 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상로 아이들은 느릿 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 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가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제재 : 샛강 주변 공단의 안개와 각박해져 가는 인심
주제 :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과 물신주의에 빠져드는 인정
<중요 시어 및 시구>
▶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 하늘
▶ 노랗고 딱딱한 태양 ☞ 매연이 가득한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안개의 군단 ☞ 산업화가 불러온 엄청난 파괴력을 의인화한 표현
▶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 공장의 매연으로 변색된 나무들의 모습
▶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 인간적 유대감이 상실된 모습
▶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 산업화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을 의미
▶ 젖은 총신을 겨눈다 ☞ 반자연적인 산업화의 상징으로 산업화의 폐해를 암시했다
▶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 반어적 표현
▶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 모두가 산업화로 인해 일정 부분 이익을 보는 동시에 그것으로 인한 폐해에 대한 책임도 있다
문명 비판적이고 참여적, 현실 고발적, 반어적인 기형도 작가님의 '안개', 표현 방법으로는 병렬적, 점층적인 구성으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단정적 어조를 사용하였다
이 시에서 안개는 인간적 유대감을 단절시키고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상징하는 소재로 보였는데 황폐화된 읍에 대한 배경을 표현해주는 시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시 속에서 나오는 "거대한 안개의 강"이라는 뜻은 거역할 수없이 심각하게 된 산업화를 뜻하는데 이에 희생되어 가는 수동적인 존재들을 쓸쓸한 가축들이라는 시구로 풀이할수 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方)/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方)
'남신의주' 지역의 '유동'이라는 마을에 사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집, 이 시의 제목은 편지 겉봉의 발신인 주소 형식이다. '방 (方)'은 예전에 편지 겉봉의 세대주나 집주인 이름 아래에 붙어 그 집에 거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화자가 일제 강점기하에서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겪은 삶의 비애를 노래하면서도,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제재: 유랑하는 삶
주제: 무기력한 삶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현실 극복 의지)
<특징>
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화자의 내면을 제시함.
② 편지 형식을 빌려 화자가 자신의 근황을 알림.
→ 화자의 내면 의식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음.
③ 화자의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 화자의 태도가 전환됨.
④ 마지막 행에서 시상을 집약하여 화자의 의지를 드러냄
⑤ 화자의 정서 변화
무기력함 → 차분해짐→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
⑥ 토속적 소재와 방언을 사용함
⑦ 산문적으로 서술을 하지만, 쉼표를 적절히 사용하여 내재율(운율) 형성
⑧ 고백적 어조를 통해 화자의 정서 및 태도를 진정성 있게 전달.
<추억/안도현>
‘추억’이라는 말은 죽은 말이다.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만 언어로서 숨이 끊겨버려 내다 버릴 곳도 없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이나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키치’라고 하는데 ‘추억’이야말로 키치 문화의 대표적인 언어다. 시골 이발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 생활에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때가 있다. 여행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곧잘 이 말을 듣게 된다. “좋은 추억 만들어 가고 싶어요.” 나는 이따위의 예쁜 척하는 말로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추억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가. 여행지가 추억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도 되나?
추억이란 아련하고 어렴풋해서 불투명 유리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뚜껑을 자세히 열어보면 온갖 구질구질한 시간의 잔해, 치욕과 모욕의 언사, 가난과 결핍의 부유물들이 떠돌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감추거나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억은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위장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과거를 낭만적인 빛깔로 채색해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너나없이 힘겹게 세월을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추억이라는 말로 ‘사실’은 가릴 수 있지만 ‘진실’마저 가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추억이란, 심장에 금이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쪽에만 아프게 새겨지는 것이다. 아파야 추억인 것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추억 돋는다’는 말을 마구 쓴다. 지네들이 얼마나 아파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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