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이러니
이 택 희
감기가 심하게 들었다. 며칠 전 스키를 타다가 다친 갈비뼈 때문에 몸의 저항력이 약해진 탓이리라. 기침이 심하고 목이 따끔거린다. 보통 때 같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감기인데도 몸이 약해져 있으니 견디기 어렵다.
신년벽두부터 건강에 이상이 생기니 조용히 집에서 지낸다. 차분히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다. 새해라고 들뜬 마음에 얼마간 활기차게 지내다가 오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고 타성에 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니 예전처럼 다니지 못하고 조심조심 움직인다.
자연히 생각을 더 깊게 하게 된다. 건강이 왜 소중한지, 건강한 몸으로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깨닫는다. 올 한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한다. 다친 곳이 많이 아프고 또 감기로 인하여 기침이 심하지만 몸이 아픈 것 이상으로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일이 귀하다.
세상사가 다 이와 같지 않을까. 몸에 힘을 잔뜩 집어넣고 잘해보겠다고 애쓸 땐 되지 않다가 몸에 힘을 빼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때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가 찾아오는 것. 가지려고 갖은 애를 쓸 때에는 가져지지 않다가 포기하다시피 하는 순간 가져 지는 것은 아닐까.
지난 해 년 말 읽을 것이 마땅치 않아 속을 태웠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이 몇 권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애타게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토론토 현지에 있는 서점을 다 뒤졌다. 읽고 싶은 책을 사고 싶었으나 정작 읽으려는 책은 없었다. 한국에서 토론토까지 신간들을 공수하지면 시간이 걸리기도 하려니와 책값이 한국에서 보다 두 배가 비싸다. 운송비용과 통관비용을 고려하면 그럴 만도 하다. 작은 규모의 사업장에 신간서적을 많이 비치해두기가 만만찮은 것이다. 책이라고 있기는 했으나 정작 읽고 싶은 문학관련 책은 많지 않았다.
한국을 방문하는 지인에게 돌아오는 길에 책을 좀 사다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 삼주 방문 후 돌아올 예정이라 하여 애타게 기다렸다. 막상 삼주가 지나 그가 귀국했을 땐 빈손이었다. 사놓고는 경황이 없어 고향에 놓고 왔다는 것이다. 무거운 책을 가지고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을 했던 것은 아닐까 후회도 되었다. 본인의 불찰을 탓할 수 밖에.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급히 전화를 하여 몇 권의 책이름을 알려주며 부쳐 줄 것을 부탁했다. 바쁜 연주일정으로 또 가르치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줄 아는지라 부탁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쩌겠는가.
한 달 보름을 더 기다린 끝에 책이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다. 우체국직원이 소포가 도착했다는 표시를 해두고 간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내일이면 우체국에서 책을 찾을 수 있다. 애타게 기다렸던 책이 왔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지.
부푼 가슴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우연히 책상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찾던 책들이 거기에 있질 않은가. 찾을 수 없어 그렇게 애를 태웠는데 한국으로부터 읽고 싶던 책이 도착했다고 하니 그때서야 나오는 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진작 허리를 좀 더 구부렸더라면 되었을 것을.
그동안 사놓고 손에 잡히지 않아 읽지 않았던 수필과 관련 이론서를 짬짬이 읽어 내려갔다. 쉽게 읽을 책이 없으니 어려운 이론서라도 읽게 되었는데 읽고 나니 큰 도움이 된다. 다른 작가의 글을 읽을 때 재미삼아 읽는 것이 아니라 분석을 하며 읽게 된다. 비평가는 아닐지라도 비평가적인 관점에서 읽으니 분석능력도 조금씩 생겨나는 것 같다.
책이 도착했다고 하니 그렇게 애타게 찾던 책이 찾아지고, 읽을 책이 없어 애태우는 동안 읽기 싫어했던 이론서를 읽게 되는 게 우리의 삶인가 보다. 읽을 책이 마땅치 않아 안달을 하면서 읽고 싶은 책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것이 큰 복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래저래 얻은 것이 적지 않다.
생각하는 대로 되지는 않지만,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것을 얻게 되는 게 인생인가 보다. 인생항로엔 크고 작은 아이러니들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