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야, 갈대야
이 택 희
무슨 미련이 있기에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고 섰느냐. 무슨 한이 있어 눈 쌓인 그곳도 마다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느냐.
나무들은 오래 전에 잎을 다 떨어트렸고 일년생 식물들과 풀들도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었건만 형체를 그대로 남겼구나.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흔들리며 이곳저곳 응시하고 있구나. 꺾일 듯 꺾일 듯 연약해보이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너.
속은 텅 비어버렸으나 정신은 더욱 영롱하고, 넋이라도 남아서 세상을 지키고 서있는 것인가. 바람에 흔들리어 휘청 굽어질망정 결코 부러지지 않는 너희는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인함을 지녔구나.
바람이 불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너희는 군무라도 추는 것이냐. 함께 무리지어서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세상에 거짓을 말하고, 다른 사람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이 엄하게 꾸짖는 것인가.
누런 꽃대를 간직한 채 서있는 갈대들아. 누구를 기다리느냐.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여 몸부림치는가. 죽어도 그 사랑을 못 잊어 돌이 된 것인가. 망부석 마냥 그렇게 서있는가.
물기는 모두 뽑아져 말라버린, 생명은 사라지고 혼만 남은 듯하구나. 혼이라도 남아서 사랑하는 사람 지켜주고 서있는가. 후세를 위해 못다 한 기도를 지금껏 하고 있는 건가.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을지니. 젊음이 있을 적에는 그 젊음이 영원한 할 것 같더니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렸다. 화려했던 젊은 날이 까마득한 일인 양 아련하다. 이제 이마에 주름이지고 얼굴엔 검버섯이 났구나.
자녀들이 어렸을 적엔 양육하느라 정신이 팔려 피곤하고 고단한 것조차 잊어버렸다. 성장하는 자녀모습 보노라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먹이고 가르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장성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이 되었고 가정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없구나.
할 일을 끝낸 지금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그냥 갈대처럼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리는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몸은 연약하나 정신은 살아 움직이며 지혜 또한 더하니 너희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것이 많구나.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너희가 그것을 알지니 말없이 너희를 바라볼 뿐.
두 눈 똑바로 뜨고 누가 너희를 해하려는지, 누가 너희를 힘들게 하는지 지켜보리라. 힘이 없고 나약하지만 혼이라도 남아서 너희를 지켜 주리라. 갈대가 먼 곳을 바라보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서있지만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가지 아니하고 너희를 바라보며 혼이라도, 넋이라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꿈길 같은 것. 잠시 세상에 와서 꿈을 꾸다보니 서산마루에 해가 걸린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제 더 바랄게 무엇이냐 그저 허허롭게 세상을 바라보며 버리고 또 버릴 뿐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야. 껍데기만 남은 갈대야. 고개를 쑥 내밀어 멀리 바라보고 있는 갈대야.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구나. 새로운 봄이 와 후손이 너의 키만큼 자라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후회도 미련도 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리 멀리 바라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는 것을.
가야한다는 것은, 기한이 있다는 건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게 하는구나. 아무 생각 없이 버리고 또 버리고 가면 되는 것, 빈손으로 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가는 삶.
욕심내지 말거라. 그냥 성실하게 한 세상 살아라. 그리고 있는 것으로 마음껏 누리고 즐거워하라 말해주는 갈대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을지니 기한이 되면 떠나야 함을 빈 몸으로 보여주는 듯하구나.
가냘픈 몸 바람에 흔들리며 삶에는 기한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너. 찰 때가 있으면 기울 때도 있는 법, 차면 비워야만 하는 것을 알려주는 갈대야.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태우고 오가는 길에 갈대숲이 두어 곳 있습니다. 자꾸만 눈길이 가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삶을 갈대에 빗대어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십 수 년째 일방적으로 사랑을 나누어주시는 선배님 연세가 벌써 육십육세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동안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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