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new friend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8. 2. 12. 21:38
 

새로운 친구

이 택 희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반갑게 반겨준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때로는 활짝 웃는 얼굴로. 가벼이 뺨을 갖다 대보고 싶기도 하고 다가가 와락 껴안아 주고 싶기도 하다. 보랏빛 자태가 매혹적이다.

현관 입구에 놓인 콘솔 위의 서양난 한 포기. 여간해서 꽃을 사지 않은 아내가 고르고 골랐다며 지난 크리스마스 사다 놓은 꽃이다. 처음에 가져 왔을 땐 어쩐지 좀 연약해 보였다. 가냘프다고나 할까. 청초한 모습의 난초 잎은 아니었다. 넓은 잎 두세 개가 싱겁게 바닥을 기며 누워있고 가늘게 뻗은 꽃대에 보랏빛 꽃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좀 연약해 보여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빛이 덜 들어오는 다소 어두운 거실 안쪽에 놓아두었다. 두 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다. 놓인 자리가 싫었던지 생전 웃지도 않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다.

햇볕을 쬐어 주고 싶다고 둘째 아이가 현관 입구 밝은 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가져다 놓은 뒤 무척이나 밝아졌다. 말만 할 수 없을 뿐이지 식물도 좋고 싫음을 구별하나 보다.

미동도 하지 않던 녀석이 감추어 두었던 봉우리에서 조용히 꽃잎을 터트린다. 아주 서서히 조금씩 꽃잎을 열어간다. 부끄러움을 아는 청순한 소녀의 모습이더니 어느덧 수줍은 새색시가 되었다. 붉은 볼을 가만히 내보인다. 서서히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이 귀하다.

연약해 보이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다. 은근하면서도 강인함을 지녔다. 잠깐 활짝 피었다 져버리는, 화려함은 가졌지만 은은함이 없어 실망스러운, 자기가 세상에 제일 곱다는 듯 뻐기다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꺾여 버리는 성급한 꽃이 아니어서 좋다. 한 풀 한 풀 벗겨가며 제 모습을 드러내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친구 같은 꽃이다.

보랏빛은 화려함은 있지만 끈질김이 없고, 잠깐 좋았다 바로 실증이 나는 색이건만 이 친구만은 예외이다. 집안에 가득한 하얀색과도 잘 어울린다.

거울에 비쳐진 녀석의 아름다움은 더 가관이다. 성숙한 여인의 길쭉한 목 줄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일락 말락 가려진 여인의 목덜미에서 느끼는 관능미도 엿보인다. 때로는 예쁜 소녀의 모습도 있다. 뭍 사내들의 보호본능을 깨우치게 한다고나 할까.

흰 눈이 잔뜩 쌓인 바깥 풍경과도 제법 어울린다. 흰색과 자주색의 찰떡궁합.       

매일 돌보아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그저 오고가며 눈길 한두 번 주면 그만이다. 속으로 잘 있었냐고 말 한마디 건네면 더욱 좋아 하는 듯하다. 물을 너무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가만히 두어도 절로 살아있으니 자신이 키우기에 적당하다고 말하며 웃는다. 말하는 아내가 난을 닮았다.

온도계가 집의 온도를 알려주듯 현관 입구에 놓여있는 란은 내 마음의 평온함과 여유로움의 정도를 보여주는 파라메타 역할을 한다. 마음이 급하고 바쁠 땐 란에게 눈길조차 주질 못한다. 집을 나서며 작별인사도 잊어버린다. 하지만 여유가 있을 땐 속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넨다. 아름다운 자태를 칭찬해주기도 하고. 난에 눈길을 주지 못할 때는 괜시리 마음만 분주하다고 보면 틀림이 없으리라.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라는 충고를 주는 듯하다. 

군락을 이루며 피는 꽃이 아니라 혼자 외롭게 고고하게 서 있는 난.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었다면 지금의 고고함을 가지긴 어려웠으리라. 화려함만 있었다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절절한 그리움을 어루만져 주기는 못하였으리라. 그리움보다는 현재의 아름다움에 취해 축제를 즐기고 있을 터이니.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친척과 이웃 친구들을 떠나 타국에 떨어져 있으니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더욱 절절하다. 고향땅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려온다. 고국의 산하가 그립고 그곳의 사람들이 그립다. 설날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식구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는 그 모습, 그 정이 오늘 따라 몹시도 그리운 것이다.

한 포기의 서양난에 이리도 눈길이 가는 건 가슴깊이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보라색은 희망의 상징이다. 고귀하고 행운이 따르는 빛이다. 양력으로 음력으로 새해 첫날을 두 번씩이나 함께 하며 복을 빌어주며 웃어주는 모습이 고맙고 정겹다. 


'수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ed  (0) 2008.02.22
stepping stone  (0) 2008.02.15
the hat fits well  (0) 2008.02.02
hat  (0) 2008.02.02
캐나다 문화 엿보기  (0) 200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