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맞는 모자
이 택 희
내게 맞는 모자가 어떤 모자일까를 두고 고민하는 둘째 아이를 보느라 가슴이 조마하였다.
며칠 전에는 아이가 자신에게 맞는 모자를 발견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것도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언니를 통하여 전해왔다. 간호사의 모자를 쓰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연주자가 되지 않겠다면 의사나 법관 등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라고 강변해 왔다.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찌 여느 부모와 다를 수 있으랴.
간호사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쑥스러웠나보다. 의사가 되겠다고 공부하고 있는 언니와 비교되는 자신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캐나다에서 간호사의 경우 사회적 지위는 어떠하며 수입은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해 보았다. 직업에 대한 선호도나 수입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후회는 없지 않으랴.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값이면 의사가 될 것이지 간호사가 왠말인가.
이러한 생각들이 다 욕심인줄 안다. 간호사가 있어야 의사도 있는 법. 자식이 의사가 되면 좋겠다고 다 의사를 하면 간호사는 누가하고 간병인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어디 그것뿐인가 아무리 의사가 되고 싶어도 성적이 되지 않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
캐나다에서 가까이 지내는 한 지인은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기업에서 15년 이상 근무하였다. 그리고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왔다. 워낙 열정이 있던 분이라 바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IBM 캐나다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매니저를 맡았다. 십 명이상의 부하직원으로부터 영업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회의시간 유창한 영어로 보고를 하면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예리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른 지시를 내리는 건 한참 먼 나라 이야기였다. 영어만 제대로 하였더라면 적잖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터였였음에도.
운이 좋았던 것인지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오래지않아 사장 비서실장에 선임되었다. 세계적인 기업의 사장을 보필하는 임원으로 선임된 것이다. 외국인이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지 못함을 감안하면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사장이 주재하는 임원회의 등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 회의를 정리하는 일을 해야 했다. 영어를 잘하는 부하직원을 들여보내 회의내용을 정리하고 보고토록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다가는 회사의 중요한 정책이나 전략이 밖으로 새어나갈 수도 있기에.
완벽하지도 않은 영어로 민감하고 중요한 회사의 정책들을 정리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섰다.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가 녹음을 하여 듣고 또 들어도 때론 완벽하게 이해 못한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꼬박 밤을 세워가며 회의록을 정리하여 다음 날 아침 사장이 출근하자마자 회의결과와 정책방향에 대해 보고를 했다.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건 좋았으나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는 더 늘어만 갔다. 동양인으로 사장의 정책비서실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고 연봉 또한 높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
오랜 고심 끝에 사표를 내기로 했다.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적극 만류했다. 성실하고 훌륭하게 잘하고 있으니 좀 더 근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번 뽑은 칼을 도로 칼집에 넣을 수는 없는 일.
회사를 나온 후 두 세달 쉬면서 부동산 중개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리고는 중개업을 시작하였다. 상업용 건물을 주로 취급하며 사고 팔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다. 중개사로 일하는 지금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예전의 연봉을 상회하는 수입을 올리며 활기차게 일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직책에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스트레스만 안긴다. 남들이 보기엔 초라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스스로 좋아하고 즐겁게 일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리라. 화려하고 값비싼 모자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일터.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돕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잘 챙겨주는 딸아이의 성품을 고려할 때 간호사라는 모자는 제법 잘 어울리는 모자가 아닐까 싶다. 끈기가 있고 참을성이 있어 어려운 일도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했다.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니 잘 된 일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으리라.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이겨내고 멋지게 한번 도전해 보거라.”
요즈음 아이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눈에서 불이 난다.
본인이 원하는 간호사가 되어 행복하게 일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웃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 딸아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예전 한국의 간호사들이 썼던 하얀 모자가 딸아이의 머리위에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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