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숭례문
이택희
숭례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온다. 멀쩡하다가도 그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글썽여진다.
늘 바라볼 수 있었던 숭례문. 함께 호흡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숭례문이 없어진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회사의 일로 중구 남창동에 위치한 대한화재 사무실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면서 위에서 내려다 본 숭례문은 고고한 아름다움을 지녔었다. 국보 제 일호를 가까이서 보고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잊어본 적이 없다. 구태여 누구에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시골출신 촌놈이 남대문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자 자랑이었다.
육백년 동안 문을 지나다녔던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남대문을 통과하는 사람, 봇짐장수, 한양 구경 차 시골서 올라온 촌부의 모습도 보였다. 선조들의 삶의 애환이 가만히 전해져 왔다.
술을 많이 마신 날 택시를 타면 늘 숭례문을 돌아서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것은 나만이 아는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은근한 불빛이 처마를 비추는 황홀경을 즐겼다. 애타게 그리던 임 모습 대할 때의 설렘과 기쁨, 행복함이 있었다.
가까이 할 수 있는 숭례문이 있기에 세상의 어떤 좋은 곳을 가더라도 마냥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귀한 보물이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로마의 트레비 분수 아래에서도, 파리에서 개선문을 돌아 상제리제 거리를 걸을 때도,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를 거닐 때도 그랬다. 버킹검 궁과 쉔브룬 궁, 베르사이유 궁을 돌아볼 때에도 다를 바 없었다. 경복궁을 생각할 땐 그런 자부심이 덜하였으나(원형 그대로가 아니라 복원되었다는 이유로) 국보 일호 숭례문을 떠올릴 땐 차원이 달랐다.
국내에서 보다 해외에서 산 날들이 더 많은 아이들이 귀국했을 때 기쁘게 숭례문을 돌았다. 영업용 택시에 몸을 싣고 숭례문을 몇 바퀴 돌며 그것이 국보 일호라는 사실을 들뜬 마음으로 일러 주었다. 아이들 역시 섬세한 한국적 아름다움에 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CNN 뉴스를 통하여 숭례문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조승휘 군이 버지니아 공대에서 무차별 총을 난사하여 젊은 지성 서른셋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한 주일동안 말을 잊었다.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가슴앓이를 하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젊은 목숨을 앗아간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을 짓눌러오는 천근같은 무게감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겨우 추스르려는 찰라 이번엔 숭례문이 불탔다. 육백년 역사가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아침 토론토스타 등 현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엔 숭례문이 불타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망연자실하였다. 사람들이 보는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토론토뿐이겠는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육백년 된 문화재가 불타오르는 장면을 지켜보았으리라. 숭례문은 이미 우리들만의 문화유산이 아니었다. 우리의 보물인 동시에 세계인의 보물이었다.
나의 마음은 아직도 숭례문이 불탔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든다. 숭례문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아리고 멍해진다. 눈동자가 힘을 잃는다. 자괴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동시대에 살면서 나는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보 일호인 문화재 하나 지켜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감각하게 살 수 있었다니. 과연 우리에게 문화재를 보물로 가질 수 있는 자격이나 있는가.
숭례문이 불탄 후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입국한 3월 15일 새벽 차를 타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문은 그 자리에 없었고 회색빛으로 둘러친 흉물스런 담장만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속이 하얗게 타 들어갔다. 타버린 재만 남은 싸한 가슴이 되었다. 차라리 엉엉 울어 막힌 가슴을 뻥 뚫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아이들에게 숭례문이 없어진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내 아이들에겐 아비의 무기력함, 아비 세대의 부끄러움을 억지로 말한다 치자. 다가올 후대들에겐 무엇이라 둘러대랴.
아메리카 인디언의 정착 역사를 빼고 나면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나라전체의 역사가 육백 년에 미치지 못한다. 반면 우리는 오천 년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남은 문화유산이라도 제대로 보호하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캐나다로 돌아가면 퀘백시(Quebec city)를 여행할 계획이다. 열 번도 넘게 다녀왔지만 금년이 도시형성 사백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라 다시 가보려 한다. 프랑스 문화를 계승한 퀘백에서 숭례문이 사라진 사실 때문에 또 한 번 가슴을 치며 눈물을 삼키게 되리라.
언제 이울음을 그칠 수 있으려는가. 마음의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는가. 세월이 약이라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깊어만 가지 않을까. 숭례문 생각만 하면 나는 그저 가슴이 먹먹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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