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속에서
이 택 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흘러간다. 시간은 마르지 않는 샘물인지도 모르겠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처럼 속절없이 흐른다. 세상의 그 무엇도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심각한 가뭄이나 개발로 인하여 샘물을 멎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이 흐르는 인정사정없는 시간. 봐주는 일 없이 일관되게 지나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누구에게나 똑 같이 흘러간다. 시간이 그렇게 공정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지 못하지 않았으랴. 똑 같이 주어지는데 개인에 따라 이루는 것이 다르다.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러니이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룬 사람이나 이루지 못한 사람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큰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도 똑 같이 늙어가고 병에 걸리고 결국엔 빈손으로 떠난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고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십대 때엔 나이 스물이 된다는 게 두려웠다. 스무 살이 되면 금방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스스로 해야 하니 책임만 무거울 게 아닌가. 부모로부터의 보호를 받고 안락한 생활을 한다는 게 불가능 할 것처럼 여겨졌다. 스무 살을 넘긴 사촌형을 보면서 나는 스무 살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겼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만이 여자로 보였다. 대학에 다니는 누나들은 다 어른 같았다. 그렇지 않던 누나들도 대학에만 들어가면 이상하게 변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얼굴엔 하얀 분을 발랐다. 은은한 향이 싫진 않았으나 자연 그대로의 얼굴만은 못하였다.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의 순수함을 잃어 버렸다. 청순한 아름다움이 없어지고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대하기가 거북했다. 영원히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자만 사랑하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잘룩한 허리에다 날씬한 몸매가 영원하리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허리에 살이 붙고 몸무게가 늘어간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뚱뚱하고 주름이 진 것은 문제가 아니니 제발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리라. 머리는 벗어지고 목에 주름살은 많아져 닭 벼슬 같다고 놀리는 소리를 듣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라고는 없다. 생명이 있는 것 치고 늙지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대학을 마쳤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어느 덧 오십이 되었다. 신혼 초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이 대학생이다. 막내가 벌써 스무 살이 되어가니 얼마나 무심한 세월인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언제 이렇게 늙었나 싶어 놀랄 때가 있다. 이마가 벗겨진 중년의 사내, 아니 중년을 넘긴 사내가 거울 앞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역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두렵고 싫을지 모르겠다. 내가 그랬듯이 그들 또한 영원한 스무 살로 남고 싶지 않겠는가. 스무 살로 남고 싶다고 스무 살로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누구든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삼십이 되고 오십이 되어있을테니.
하지만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감성이 있어 행복하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귀하고 귀하다. 인정사정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겠지만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는 시간은 늘 일 수 있으리라.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오래,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감격하고 감사하는 시간만이 전정으로 살아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후회 없이 하는 일은 세월을 늘이는 일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불사르는 것은 행복을 늘이는 일이다. 남들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에는 기쁨과 보람이 있을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림을 그리는 일이건 글을 쓰는 일이건 춤을 추는 일이건 가구를 만드는 일이건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에는 기적이 일어난다. 장인이 되는 것 역시 일에 몰입하여 미치도록 그 일에 빠져들 때 가능하지 않을까
아내는 거울을 보고 자신이 너무 아름다워 놀란다고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차를 타고 앞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한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 웃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지만 때로는 아내의 그런 자의식, 자신감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삶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일 터이니.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 한다. 하고 싶은 일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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