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아웃 사이더(낯선 곳에서 보낸 365일)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8. 10. 7. 11:35

아웃 사이더(낯선 곳에서 보낸 365일)

이택희

토론토에 와서 사계절을 온전히 경험하였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아들며  파릇파릇 싹이 돋았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는 몸집을 불리어 어른이 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자 푸르던 수목은 채색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빨강, 노랑 물들이며 마지막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가 보다.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잠 준비를 한다. 절정의 시간이 마냥 길게 이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옷깃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대지 위로 흩날리는 낙엽이 을씨년스럽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아메리카 대륙 동부에서의 삶은 부럽기도 하였으나 때론 낯설기도 하였다. 나무와 잔디, 꽃이 많아 도시 전체가 공원 같은 토론토. 그래서 마음이 편해 지는 곳. 매사에 급할 일이 없고 늘 여유로운 곳, 그러면서도 행해져야 할 일은 어김없이 행해지는 곳, 어디에서나 줄을 서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의 일 년은 평온하지만 지루함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직장일로, 생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산다. 늘 쫓기는 듯 여유를 찾기가 어렵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하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형편이 못된다. 인간구실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시간에 휘둘릴 수 밖에 없다. 고국의 생활과 비교하면 이곳에서의 나날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할 정도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한국인끼리도 생업에 바빠 만나고 싶을 때 만나 여유롭게 이야기 할 형편도 못 된다.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 할 상대를 찾기도 어렵다. 한 다리만 걸치면 알게 될 정도로 워낙 바닥이 좁다보니 자칫 여과없이 이야기하다가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 조심이 된다.

이국땅에서 살며 편하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무 한 그루도 옮겨 심으면 몸살을 앓지 않던가. 하물며 오십 년을 고국에서 살아온 인간임에랴.

토론토의 경우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울려 살기에 겉으로는 특별한 차별이 없다. 하지만 내면을 가만히 들어다보면 백인위주의 삶이 고착화 되어있다. 이러한 사회에 적응하려면 우선 언어에 제약이 없어야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 많은 한국인 이민자의 경우 언어가 능통하지도 않고 사회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없이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

골프장에서 골프를 하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여도 이방인일 따름이다. 늘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지만 어쩐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비친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이 한정되어 지루하기도 하여 때론 정 붙일 데 없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의식주 해결에 급급하다보면 정작 문화라든가 역사, 철학 등엔 관심을 두기도 쉽지 않다.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언어수준이 현지의 초등학생 수준도 되지 못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민 생활을 하려면 이전에 고국에서의 일은 깡그리 잊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부를 얼마나 하였던, 어떤 위치에 있었든, 어떤 일을 하였든 잊어버려야 한단다. 과거와 욕심, 두 가지를 버리고 또 버리면 조금은 살만해 진다고 한다.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남보다 나아지겠다는 욕심,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살아갈 용기가 난단다. 다 내려놓는 순간이 새로운 출발점이라 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고 살아갈 재미를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또 즐길 건 즐길 줄 아는 지혜도 생기게 되리라.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다. 적신으로 태어나 적신으로 떠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늘 혼자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아플 때 대신 아파줄 수도 없지 않은가. 결국 근본적인 치유는 자신의 몫이다.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면 스스로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으로 찬바람을 맞을 준비를 하는 나목(裸木)처럼 스스로 비우고 또 비워야 한다. 황량한 대지에 꼿꼿이 서서 모진 칼바람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살을 도려내는 한파를 견디고 견디면 언젠가 새로운 봄이 찾아 올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가 맺히듯 낯설음과 외로움을 이기면 기쁨의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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