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시
이택희
황홀한 장미에도 가시가 있다. 꺾어가지 못하게 자구책으로 가진 것이리라. 장미에 있는 가시처럼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다.
기분 전환 겸 한국 분이 운영하는 호프집을 찾았다. 중국에서 온 교포로 캐나다 영주권을 가진 친구 둘과 한국에서 이민 온 두 사람 그리고 나 다섯 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후배의 아들 태한이가 테이블로 와 인사를 한다.
토론토로 처음 왔을 때 입학수속을 도와 주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관심있게 지켜보는 친구다. 가끔 말썽을 피운다는 소식도 있었으나 성격이 괄괄하고 적극적이라 현지의 친구들과도 잘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곤했다. 이런 태한이를 호프집에서 만난 것이다.
가게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일을 하고 있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11학년이라 대학갈 준비로 바쁠 터이고 아직 미성년자인데. 늦게까지 일하는 후배의 아들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한편 기특하기도 하지만 당혹스럽다.
일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공부해야 할 시기에 공부를 해두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삼 년 전에 캐나다로 왔으니 영어도 많이 서툴지 않을까. 푼돈 벌겠다고 정작 기본을 익히지 않는다면 사는 날까지 굴레가 될 수 있을 터이다.
한국을 방문 중인 후배는 아들이 식당에서 일하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알고도 묵인 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의 뜻을 꺽을 수 없어 그냥 일하게 버려 두는 걸까. 아예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한 선배는 중학교 일학년에 다니는 아이를 캐나다로 데리고 왔었다. 영어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는 고등학교를 제 때에 마치지 못하였다. 한국에 있을 땐 공부도 곧잘 하였고 디자인이나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어 그 쪽 방면으로 진출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를 모았다. 캐나다에 와서 자신감을 잃은 아이는 자신이 나아가야할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J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만 마치고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가정을 가지자 안정된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카리오 프락터가 되는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열정적으로 공부한 J는 카리오 프락터(접골원, 안마사)자격증을 땄고 그 방면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태한이의 경우 되지도 않는 영어로 11학년 수준의 책읽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억지로 책을 읽으려 애쓰며 머리 아파하는 것보다 일을 하여 돈 버는 게 낳겠다고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성적이 뛰어나게 좋으니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하여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며 경험을 쌓겠다는 것인가. 어쩌면 틈틈이 돈을 벌어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갈 경비를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도 쉽지 않은 주방보조 일을 자청하여 너끈히 해내고 있는 녀석을 보자 기특한 마음도 든다. 그런 도전 정신이면 못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성격이 좋아 앞으로 사업을 하면 잘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 양파튀김과 닭튀김(치킨 핑거)을 내어오며 서비스로 드리는 것이니 맛있게 드시란다. 사회성도 있고 근성이 있어 앞으로 가능성이 많은 아이이다. 어쩌면 공부하려고 애쓰는 모범생이 되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업을 하면 더 크게 성공할지도 모르겠다. 성공이라는 게 꼭 돈을 많이 번다거나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아이에게는 공부 자체가 가시일 수도 있겠다. 아프긴 하지만 무작정 없엘 수 있는 가시가 아니라면 극복해야 한다. 무섭다고 피하기만 하면 나중에 더 큰 가시가 되어 자신을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자산 가치는 떨어지고 환율을 올라 경제적인 어려움이 눈앞에 닥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글이나 쓰고 여행이나 하면서 유유자적 살려고 하였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수입보다 지출이 큰 현실을 감안하면 더 노력해야 한다. 다시 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 경제의 날개 없는 추락이 개인 경제에도 쓰나미를 몰고 왔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일종의 가시임에 분명하다. 가시덤불 속과 같은 어려운 여건을 슬기롭게 극복해 가면 양약이 될 수도 있으리라. 가시가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하는 채찍 역할을 하고 있음이다.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다. 가시를 잘 이용하면 더 겸손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 가시를 주는 것은 그 가시를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라는 신의 뜻일지 모른다.